항목 ID | GC056005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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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和順炭鑛勞動者蜂起 |
분야 | 역사/근현대,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전라남도 화순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희송 |
발단 시기/일시 | 1946년 2월 24일 - 화순 탄광 전 종업원 대회 개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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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개 시기/일시 | 1946년 8월 15일 - 화순 탄광 노동자 광복 1주년 기념식에서 미군정과 충돌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46년 9월 29일 - 화순 탄광 노동자 봉기 발생 |
전개 시기/일시 | 1946년 10월 31일 - 화순 탄광 노동자 대규모 시위 발생 |
종결 시기/일시 | 1946년 11월 - 화순 탄광 노동자 봉기 민군정에 의해 진압 |
발생|시작 장소 | 화순 탄광 - 전라남도 화순군 동면 충의로 1064[복암리 893-3] |
성격 | 사회 운동 |
관련 인물/단체 | 화순 탄광 노동조합 |
[정의]
1946년 전개된 전라남도 화순 지역 탄광 노동자들의 투쟁.
[개설]
광복 후 화순 탄광 노동자들의 투쟁은 크게 1946년 2월 24일부터 3월 11일까지의 해고 사건, 1946년 8월 15일의 해방 1주년 기념일 사건, 1946년 10월 31일부터 11월 9일까지의 10월 추수 항쟁 기간의 식량 투쟁 사건으로 구분할 수 있다.
[역사적 배경]
화순 탄광 노동자 투쟁은 광복 후 일본 재산의 소유와 관리를 둘러싼 미군정과 탄광 노동자들의 갈등에서 촉발되었다. 일제 강점기 식민지 공업화 정책에 따른 광산 산업의 발달과 광산 노동자들의 급격한 증대는 광산 지역 노동 운동이 활성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광복 직후 남한 석탄 생산 3위의 위치를 점유하고 있던 전라남도 화순 지역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일제 패망 후 화순 탄광은 노동자들이 자치 위원회를 구성해 자율적으로 운영하고 있었으며 노조 지도부에는 일제 강점기 광주 학생 독립운동 출신들이 참여하는 등 자체 지도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1945년 11월 화순 탄광에 진주한 미군정은 노동자 자치 위원회의 탄광 운영을 불법화하고, 화순 탄광을 미군정이 접수한다고 발표하면서 노동자들과 갈등을 빚기 시작하였다.
[경과]
화순 탄광을 접수한 미군정은 탄광 소장을 교체하고, 노동자들이 임금 투쟁이나 파업을 전개한다면 징역형을 살게 하겠다고 위협하였다. 또한 노조 간부 3인을 비롯한 100여 명의 노동자를 해고하였다.
미군정의 탄압에 맞서 화순 탄광 노동자들은 1946년 2월 24일 전종업원 대회를 개최하고 최저 생활 확보 임금제 실시, 해직자 복직, 후생 시설 정비, 소장 독재 배격, 불량 임원 축출, 일요 완휴제 등 6개 항을 군정청에 제시하고 협상을 요구한다. 화순 탄광 노동자들의 2월 투쟁에서의 요구는 노무 조정 위원회의 협의를 거쳐 타협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러한 타협도 잠시, 8월 15일 광복 1주년 기념식을 계기로 본격적인 갈등에 돌입하였다. 광주 지역에서 개최되는 광복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새벽 3시 광주 지역으로 출발한 화순 탄광 노동자들을 미군정이 탱크와 비행기를 동원해 진압하는 과정에 1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이다. ‘완전 독립 보장’과 ‘쌀을 달라’는 피켓을 들고 광주 지역으로 진입하던 노동자들에게 화순 지역으로 돌아갈 것을 종용하는 과정에서 노동자들에게 총격을 가하면서 발생한 참극은 일방적인 희생으로 일단락되는 듯했다.
그러나 지속적인 식량난은 1946년 10월 전국을 휩쓴 추수 봉기와 맞물리면서 대규모 항쟁으로 연결되었다. 9월 총파업의 일환으로 화순 탄광 노동자들은 식량 문제 해결과 임금 인상을 요구하였으나 미군정은 이러한 요구들을 무시하였다.
미군정은 9월 29일부터 파업에 돌입한 화순 탄광에 10월 4일 미군을 투입해 파업의 해산을 시도하였다. 해산 과정에서 노동자들이 사망하고 수많은 노동자들이 체포되는데, 이러한 탄압에 맞서 10월 31일에 화순 탄광 노동자, 농민·부녀 동맹이 동원한 주민 등 2~3천 명이 참여한 대규모 시위가 개최되었다. 10월 이후 끊임 없이 전개되는 화순 탄광 노동자들의 시위에 대처하기 위해 미군정은 11월 화순 탄광을 폐쇄하고 대대적인 수색과 검거를 통해 화순 탄광 노동조합의 와해를 시도하였다.
[결과]
1946년 11월 대대적인 검속에 돌입한 미군정은 6사단 증원 부대까지 동원하여 노동자들의 시위를 진압하고 우익계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노조 지도부를 구성하였다. 노조 간부와 활동가들은 미군정의 검거를 피해 화순 지역 인근의 산으로 숨어 들어갔으며, 이들 중 많은 수가 이후 빨치산 활동으로 연결되었다.
[의의와 평가]
광복 후 1946년을 중심으로 전개된 화순 탄광 노동자 봉기는 식량을 요구하는 탄광 노동자들의 생존권적 요구와 완전한 자주 독립을 촉구하는 과정에서 미군정과 충돌한 저항 운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