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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600544
한자 北面良民虐殺
분야 역사/근현대,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남도 화순군 북면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조광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단 시기/일시 1949년 10월연표보기 - 전라남도 화순군 백아면 수리에서 양민 학살 발생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50년 11월연표보기 - 전라남도 화순군 백아면 맹리에서 양민 학살 발생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50년 11월연표보기 - 전라남도 화순군 백아면 와천리에서 양민 학살 발생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50년 12월연표보기 - 전라남도 화순군 백아면 임곡리에서 양민 학살 발생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50년 12월연표보기 - 전라남도 화순군 백아면 원리에서 양민 학살 발생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50년 12월연표보기 - 전라남도 화순군 백아면 노기리에서 양민 학살 발생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51년 3월연표보기 - 전라남도 화순군 백아면 송단리에서 양민 학살 발생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51년 4월연표보기 - 전라남도 화순군 백아면 옥리에서 양민 학살 발생
발생|시작 장소 군경에 의한 백아면 양민 학살 장소 - 전라남도 화순군 백아면 수리 지도보기
발생|시작 장소 국군에 의한 백아면 양민 학살 장소 - 전라남도 화순군 백아면 맹리 지도보기
발생|시작 장소 국군에 의한 백아면 양민 학살 장소 - 전라남도 화순군 백아면 임곡리 지도보기
발생|시작 장소 국군에 의한 백아면 양민 학살 장소 - 전라남도 화순군 백아면 송단리 지도보기
발생|시작 장소 경찰에 의한 백아면 양민 학살 장소 - 전라남도 화순군 백아면 옥리 지도보기
발생|시작 장소 빨치산에 의한 백아면 양민 학살 장소 - 전라남도 화순군 백아면 와천리 지도보기
발생|시작 장소 빨치산에 의한 백아면 양민 학살 장소 - 전라남도 화순군 백아면 원리 지도보기
발생|시작 장소 국군에 의한 백아면 양민 학살 장소 - 전라남도 화순군 백아면 와천리
발생|시작 장소 국군에 의한 백아면 양민 학살 장소 - 전라남도 화순군 백아면 노기리 지도보기
성격 양민 학살 사건

[정의]

1949년 10월부터 1951년 3월 사이에 군과 경찰, 그리고 빨치산이 전라남도 화순군 북면(현 백아면)에서 현지 주민들을 학살한 사건.

[개설]

화순군 북면(현 백아면)은 1950년 9월 이후에 조선 노동당 전남 도당과 산하 전남 유격 사령부가 설치되는 등 빨치산의 본거지 중 하나였다. 군과 경찰은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해 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병력을 투입하여 지속적으로 크고 작은 전투를 벌였다. 전투 과정에서 피아(彼我) 간의 구분이 불분명하고 전시라는 특수한 상황이라는 이유로 군경과 빨치산 모두 비무장한 민간인을 대상으로 비인도적인 학살 행위를 하였다.

[역사적 배경]

군경은 빨치산의 활동을 약화시키기 위해 1950년 12월부터 빨치산의 거점인 화순군 북면 백아산 주변에서 주민들을 이주시켰다. 화순군 북면의 북동부 지역은 인근 전라남도 곡성군으로, 북서부 지역은 전라남도 담양군으로, 남부 지역은 화순군 이서면 보산리 난산 마을[당시 국군 11사단 20연대 3대대 11중대 주둔지]로 이주했다. 주민들이 떠난 마을은 불태워 향후 빨치산이 활용할 수 없도록 했다. 이주 및 방화를 통해 빨치산과 주민 간 접촉을 차단하고 빨치산의 병참 거점을 제거하고자 했다.

[경과]

14연대 반란과 토벌 과정에서 화순군 북면에서 발생한 대표적인 민간인 희생은 1949년 10월에 일어났다. 군경은 화순군 북면 소재지인 이천리가 자주 공격당하자 수리 일대의 주민들을 아산 국민 학교에 소집시켰고 주민들 가운데 입산자 가족, 반란군 강연 참석자, 혹은 반란군 협조자로 의심되는 사람들 49명을 학살하였다.

인민군이 화순군에서 퇴각한 1950년 9월 이후에는 민간인 희생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국군 20연대 3대대는 1950년 11월 화순군 북면 맹리 원덕 마을에 인민군으로 변장하고 마을에 들어가 총으로 위협하는 가운데 북한 찬양을 강요했고 강요에 따른 주민 30여 명을 학살했다. 국군 20연대 3대대는 12월에 산으로 피신한 화순군 북면 임곡리 주민들에게 투항하면 살려 준다고 해 주민들이 하산하자 청년 3~4명을 살해하고 마을을 소각했다.

1951년 3월 2연대 1대대는 화순군 북면 백아산 아래 송단리에서 화순군 이서면 주민 2명을 처형했다. 처형된 2명은 원래 우익이었는데 인민군 치하에서 우익이라는 이유로 고통을 받자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좌익에 협력했다가 11월 이서면에 군경이 들이닥치자 보복이 두려워 빨치산을 따라갔다가 죽임을 당했다. 좌익·우익의 잦은 보복이 빚은 비극이었다.

외딴 마을에 잔류한다는 이유만으로도 적대 세력으로 의심을 받아 살해되기도 하였다. 1951년 4월 화순군 북면 옥리 구수 마을에 머물던 주민 6명은 군경의 이주 명령에 따르지 않는 것 자체가 빨치산이란 의심을 사 경찰에 의해 현장에서 살해되었는데 희생자 중에는 아기도 포함되어 있었다.

적대 세력의 가족이나 협력자로 의심되는 사람들도 살해되었다. 1950년 11월 빨치산은 화순군 북면 와천리에 거주하던 가족 6명을 두 차례에 걸쳐 처형했는데 이유는 가족 중 군경의 입성을 앞두고 의용군에 가지 말 것을 종용하는 전단을 마을에 뿌린 것에 대한 보복이었다. 같은 시기 빨치산은 원리에 사는 가족 6명을 납치하기도 했는데 납치된 사람들은 모두 살해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납치된 이유는 군인들의 수색을 돕고 가족 중에 현직 군인이 있었다는 이유에서였다.

1950년 12월 화순군 북면 원리에서는 두 가족 18명이 학살당했는데 주민들에게 구덩이를 파게 한 뒤에 죽창으로 찔러 살해하고 구덩이에 매장했다. 죽인 이유는 가족이 경찰의 부탁으로 소소한 석공이나 목공 일을 해준 것에 대해 경찰의 밀정으로 의심한 데 따른 것이었다.

국군 20연대도 화순군 북면 와천리 주민 10명을 현장 및 연행 후에 살해했는데 당시 빨치산이 와천리에 유숙한 사실을 들어 주민들이 빨치산과 내통하고 있을 것이라는 짐작한 데 따른 학살이었다.

[결과]

많은 학살은 절차조차도 위반했을 뿐 아니라 명백한 근거 없이 예단에 기초해 자행되었다. 감정적이고 즉흥적인 살해도 다반사로 일어났다. 1950년 12월 3대대 12중대는 화순군 북면 노기리에서 피난 짐을 꾸리는데 시간을 지체한다는 이유로 주민 2명을 살해했다.

[평가]

2009년에 진실 화해 위원회는 빨치산은 물론이고 당시 빨치산 토벌에 나선 군과 경찰에도 절차 위반, 비 인도주의적 행위 등을 들어 학살의 책임을 물었다. 위원회는 주민들이 작전 지역에 거주하면서 적에게 동조했을 것이라 의심되는 정황이 있더라도 법적 절차 없이 비무장 민간인을 살해한 행위는 헌법에 보장된 기본권인 생명권, 적법 절차 원칙과 재판 받을 권리를 침해한 것으로 판단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20.10.14 내용수정 "북면 → 백아면"으로 수정
이용자 의견
윤** 2020년 1월 1일부터 북면에서 백아면으로 변경 되었습니다. 수정해주세요.
  • 답변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기하신 의견에 따라 내용수정을 완료했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2020.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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