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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단에 자금을 조달한 대한 광복단 단원 김영하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6C030101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마을/마을 이야기
지역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도장리 도장 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한미옥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김용상 출생 1858년 3월 2일 - 독립운동가 김용상이 출생하였다. 김용상은 독립군 자금을 대는 등 애국활동을 하였고, 군자금 제공자의 밀고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복역 중 고문으로 사망하였다.
김영하 출생 1872년 - 김영하는 한일합방후 의병에 가담하여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였으며, 광복단의 조직과 함께 독립운동가에 몰래 군자금을 지원하였다.
김용상 경향의사단 조직 1914년 - 1910년 한일합방조약이 체결되자, 뜻을 같이 한 인사들과 함께 1914년 경향의사단(京鄕義士團)을 조직하여 일제침략에 항거하였다.
김영하 대한 광복단 제일지단 단원 1916년 - 김영하는 대한 광복단 제일지단의 일원이 되어 국권회복을 위해 투쟁하였다.
김영하 사망 1921년 1월 11일 - 도장 마을에 내려와 은신해 있다가 1918년 5월에 능주 헌병대에 체포되어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고문으로 인한 여독으로 사망하였다.
김영하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1990년 12월 26일 - 독립운동을 하다가 사망한 김영하 선생의 공로를 인정받아 1990년 12월 26일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김용상 대통령표창 추서 2003년 8월 15일 - 독립군 자금을 대는 등 애국활동을 하다가, 군자금 제공자의 밀고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복역 중 고문으로 사망한 김용상 선생에게 독립의사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김영하 추모비 건립 2007년 12월 30일 - 광복단에 자금을 조달하는 역할을 한 대한 광복단 단원 김영하 추모비를 세웠다.
마을지 김영하 추모비 -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야사리

[민족의 수난과 도장 마을]

송정 김영하 선생과 그의 스승 해석 김용상 선생. 도장 마을에서 출생한 이 두 선생의 애국혼은, 지금 마을 입구에 세워진 충혼탑에 오롯이 깃들어 있다. 충혼탑은 선생의 후손들과 마을주민, 그리고 화순군의 도움으로 2007년 12월 30일에 마을 앞에 세워지게 되었다. 세월의 흐름과 함께 이제 마을에는 두 선생과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은 없다. 그러나 두 선생의 고결한 애국정신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많다. 그의 후손들이 아직도 마을에 살고 있고, 그들의 충혼비가 마을 앞을 지키고 있는 한 선생의 나라를 위한 마음은 세세토록 도장 마을 사람들의 귀감이 될 것이다.

“우리가 어려서 들어보면은. 우리 어머니랑 모도(모두) 앉아서 바느질을 하시면서, 그 양반이 그 전에 그냥 막 넘의 것 뺏고 다니고 그러다가 잽혀가셔 가지고 어디서 죽었는지도 모르고. 돌아가셔가지고 모른다고 그러시더라고. 그래가지고 속된 말로 쉬쉬했죠. 참말로 넘의 것 뺏고 탕난질을 하고 다녔다면 자랑할 일은 못된 것이지요. 그렁께 일본사람들이 독립운동가들을 전부 다 강도 상해죄를 저지른거처럼, 막 이런 식으로 몰아간 것이지요. 판결문에 그렇게 나와 있어. 판결문에 그렇게 나오니까 자랑할 만한 것이 못된 것이죠.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독립운동하다가 돌아가셨더라고.”(김성인)

도장 마을에 살고 있는 김영하 선생의 손자 김성인 씨는 할아버지가 그야말로 폭도이고 강도인 줄로만 알고 유년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그런데 그것이 독립운동가들을 매도해서 독립의 의지를 꺾고자 했던 당시 일본인들의 교묘한 술수였던 것이다. 이제라도 두 분 선생의 고결한 나라 위한 마음이 밝혀지고, 충혼탑에 남아서 후손들의 귀감이 되고 존경을 받게 되었으니 천만 다행한 일일 것이다.

[독립운동가 김용상 선생의 영향을 받아]

김영하 선생은 집안 아저씨 뻘이었던 김용상 선생의 수하에서 수학하던 중, 일제 강점기를 맞아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김영하 선생이 구국을 위한 결단의 바탕에는 숙부였던 김용상 선생의 영향이 컸다.

해석 김용상 선생의 자는 익중(益重)으로, 1858년(철종 9) 3월 20일에 도장리에서 출생하였다. 문장이 뛰어나 인근 선비들의 추앙을 받던 분으로,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하자 고종 21년에 도장 마을로 내려와서 후학을 양성하였다. 그러던 중 1910년 한일합방조약이 체결되자, 뜻을 같이 한 인사들과 함께 1914년 경향의사단(京鄕義士團)을 조직하여 일제침략에 항거하였다. 이후에도 독립군 자금을 대는 등 애국 활동을 하다가, 군자금 제공자의 밀고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복역 중 고문으로 사망하였다. 김용상 선생은 2003년 8월 15일 제142750호 독립의사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 이처럼 애국지사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던 김영하 선생은 자연스럽게 독립운동가의 길로 접어들게 된 것이다.

[구국을 위해 몸을 바친 김영하 선생]

송정 김영하 선생의 자는 중선(重先)이다. 고종 9년 1872년 전남 화순군 도암면 도장리에서 아버지 김노상과 어머니 밀양 박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기골이 장대하고 본디 성품이 매우 강직하였다고 전한다. 해석 김용상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애국애족정신을 배워 익혔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어 나라가 망하게 되자, 선생은 통분을 이기지 못하여 의병에 가담하여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였다. 하지만 중과부적으로 의병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되자, 다른 방법으로 일제에 항거하기로 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비밀 무장단체인 대한 광복단을 조직하여 친일분자들을 처단하고 옥중 동지를 도우며, 군자금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그때 뜻을 같이 한 이들은 정동근, 고성후, 양재홍, 김교략, 문재교 등이었고 선생은 이들과 함께 대한 광복단 제일지단(第一支團)의 일원이 되어 국권회복을 위해 투쟁하였다. 또 선생은 자신의 전 재산을 광복 독립운동 자금으로 내놓는 한편, 나주의 정경원, 윤덕열, 함평의 정치국 등 도내 부호에게도 광복군 군자금을 출원케 하여 광복군과 의병을 돕고 해외 망명동지를 도우며 옥중 동지를 구출하는데 주력하는 등 일제 강점기하 독립을 위해 노력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함평에서 군자금 제공자의 밀고로 체포령이 떨어지게 되었다. 선생은 이에 고향인 도장 마을로 내려와 은신해 있었지만, 결국 1918년 5월에 능주 헌병대에 체포되어 10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고문으로 인한 여독으로 결국 1921년 1월 11일에 대구 감옥에서 병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대한 광복단 단원이었던 김영하 할아버지는 마을당산나무 아래에 나와 계시다가 잡혀가셨다고 합니다. 독무지기 김종석 씨 사랑방에 숨어계시다가 날이 오뉴월이라 하도 더우니까 그리 나가 계셨는디 헌병들이 와서 포위해 가지고 들어왔어. 그래가지고 김영하가 어떤 놈이냐 그런께 ‘내가 김영하요’ 하고 나섰다고 그래요. 그래갖고 거기서 잽혀가지고 ‘화지계’를 매. 머리 상투를 풀어가지고 이렇게 뒤로 빼가지고 손을 포승을 짓는 것을 화지계라고 하드만, 어른들이. 그래가지고 영영 못 돌아오고 말았지요. 옥사했어요 대구에서.”(김성인)

당당히 “내가 김영하”라고 말하고 잡혀가는 그의 모습은 진정한 독립군답다. 김영하 선생은 1980년 8월 14일 제1238호 독립의사 건국훈장이 추서되었고, 다시 1990년 12월 26일 제213호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정보제공]

  • •  김성인(남, 1958년생, 도암면 도장리 도장 마을 주민, 김영하 후손)
  • •  김양기(남, 1923년생, 도암면 도장리 도장 마을 주민)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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