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500662 |
---|---|
한자 | 南宮枕 |
영어공식명칭 | Namgung Chim |
이칭/별칭 | 성중(誠仲)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북도 익산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류호석 |
[정의]
조선 전기 익산 출신의 문신.
[가계]
남궁침(南宮枕)[1513~1573]의 본관은 함열(咸悅)이고 자는 성중(誠仲)이다. 할아버지는 이조판서를 지낸 남궁찬(南宮璨)이고, 아버지는 동복현감 남궁익(南宮翼)이다. 어머니는 김인각(金麟角)의 딸 연안김씨(延安金氏)이다. 형은 사섬시첨정 남궁희(南宮憘)이고, 동생은 지평현감 남궁개(南宮愷)이다.
[활동 사항]
남궁침은 1513년(중종 8) 익산에서 태어났다. 1537년(중종 32)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540년(중종 35) 별시문과에 급제하였다. 1544년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거쳐 1545년에는 춘추관기사관으로 『중종실록(中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1548년에는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으로 강원도에 암행어사로 파견되어 빈민 구호를 제대로 하지 못한 원주목사와 판관을 파직시켰다. 이후 이조좌랑과 사헌부장령 등을 역임하고 1552년 경상도에 암행어사로 파견되었다가 돌아와 홍문관직제학을 거쳐 우부승지, 좌부승지, 장례원판결사, 우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557년 동지중추부사, 1558년 개성유수를 거쳐 1563년 한성부우윤·한성부좌윤·형조참판을 지냈으며, 1564년 전라도관찰사로 부임하였다.
남궁침은 1565년 함경도관찰사로 부임하였으나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고 체직되었다. 다시 조정에 들어와 한성부좌윤, 동지중추부사, 한성판윤을 지내다가 외척 윤원형(尹元衡)과 함께 대사헌 구수담(具壽聃)을 사사(賜死)하도록 모의하였다는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이후 복직되어 형조참판을 지냈다. 1573년 사망하였다.
[묘소]
남궁침의 묘소는 『함열남궁씨세보(咸悅南宮氏世譜)』에 무수동(无愁洞) 선영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무수동은 오늘날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무수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