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330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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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宋時烈肖像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물/서화류 |
지역 | 충청북도 제천시 봉양읍 의암로 566-7[공전리 475]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조인수 |
문화재 지정 일시 | 2012년 7월 6일 - 송시열 초상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32호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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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6월 23일 - 송시열 초상 보물 제2128호 지정 |
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송시열 초상 보물 재지정 |
현 소장처 | 제천 의병 전시관 - 충청북도 제천시 봉양읍 의암로 566-7[공전리 475] |
원소재지 | 황강 영당 - 충청북도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산33 |
성격 | 회화|초상 |
작가 | 김창업 |
서체/기법 | 비단 바탕에 채색 |
소유자 | 안동 권씨 화천군파 |
관리자 | 제천 의병 전시관 |
문화재 지정번호 | 보물 |
[정의]
충청북도 제천시 봉양읍 공전리 제천 의병 전시관에 있는 조선 후기 성리학자 송시열의 초상.
[개설]
송시열(宋時烈)[1607~1689]은 과거 시험에서 장원으로 합격한 뒤 학문으로 이름을 널리 떨쳤고, 나중에 효종(孝宗)이 되는 봉림 대군(鳳林大君)의 스승이 되었다. 효종의 두터운 신뢰를 얻어 청나라를 물리치려는 북벌 계획을 세웠지만 서인(西人)의 지도자로서 계속되는 당쟁의 와중에 반대 세력의 공격을 받아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결국 한양으로 압송되는 도중에 사약을 받고 죽었다. 이후 다시 명예가 회복되어 노론(老論)의 지도자로 추앙되었다.
송시열 초상은 “우암 송 선생 칠십사세 진(尤庵宋先生七十四歲眞)”이라고 쓴 화제(畵題)로 1680년쯤의 모습을 그린 것을 알 수 있다. 당시는 오랜 유배 생활에서 풀려나 다시 영중추부사의 직에 오른 시기였다. 제자인 김창업(金昌業)[1568~1722]이 초상화를 기초하고 화원이 완성했다는 기록이 있다. 실제로 그림 위에는 김창업이 초상을 그렸고, 그의 형인 김창협(金昌協)[1651~1708]이 찬문을 지었으며, 송시열의 또 다른 제자인 권상하(權尙夏)[1641~1721]도 찬문을 짓고 이것을 모두 권상하의 문인인 채지홍(蔡之洪)[1683~1741]이 옮겨 적었다고 밝히고 있다. 송시열 초상은 1726년(영조 2) 건립된 제천 황강영당(黃江影堂)에 권상하, 한원진(韓元震), 윤봉구(尹鳳九) 등의 초상과 함께 봉안되어 있었다고 한다. 2012년 7월 6일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32호로 지정되었다. 2021년 6월 23일 보물 제2128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보물로 재지정되었다.
[형태 및 구성]
비단 바탕에 채색으로 그렸으며, 크기는 가로 62㎝, 세로 92.5㎝이다. 현재 액자 형태로 되어 있다. 방건을 쓰고 심의를 입은 상반신 모습이다.
[특징]
얼굴을 살펴보면 깊게 파인 주름을 굵은 선으로 과장해서 표현한 것이 눈길을 끄는데, 이는 송시열의 곧은 성품과 거칠 것 없던 기개를 잘 나타낸다. 풍성한 수염은 군데군데 검은 터럭이 있고 전체적으로는 하얗게 변했지만 기다란 눈썹은 아직도 검다. 콧수염 아래로 보이는 두툼한 아랫입술은 곧은 성품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평상복인 심의는 중국 송나라의 유학자였던 주희(朱熹)[1130~1200]가 입었던 옷으로 조선 시대에 예학이 발달하면서 유학자들에게 널리 보급되었다. 송시열은 모두 합해서 8년간 벼슬에 올랐지만 그때마다 공복(公服)은 빌려 입었고 스스로 만든 일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초상화는 모두 관복이 아니라 유복을 입은 모습이다. 현재 알려진 송시열의 초상화는 20여 점에 이르는데 모두 유복본 초상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