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7004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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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召西奴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왕족·호족 |
지역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
시대 | 고대/삼국 시대/백제 |
집필자 | 오현숙 |
[정의]
고대 초기 국가 시대에 현재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를 포함하는 미추홀(彌鄒忽) 지역에 터를 잡은 백제 건국 시조 비류(沸流)·온조(溫祚)의 어머니.
[개설]
소서노(召西奴)는 백제를 건국한 비류(沸流)와 온조(溫祚)의 어머니로 건국 신화에 나오는 인물이다. 2008년 간행된 『역사 속의 인천 여성』에서 소서노는 177명의 인천 여성 중 한 명으로 뽑혔다.
[활동 사항]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백제의 시조를 온조로 한 것과 비류로 한 것, 두 가지가 있다. 소서노는 ‘일운(一云)[확실한 정설은 아니고 풍문이나 어떤 가설이라는 뜻]’으로 전하는, 비류를 시조로 전하는 건국 신화에만 등장한다.
신화를 보면, 시조 비류왕의 아버지는 우태(優台)로 북부여(北夫餘)의 왕 해부루(解夫婁)의 서손이었고, 어머니는 졸본(卒本) 사람 연타발(延陀勃)의 딸이다. 연타발의 딸은 처음 우태와 혼인하여 비류와 온조를 낳았고, 우태가 죽은 뒤 졸본에서 혼자 살았다. 이후 부여에서 남쪽으로 도망하여 졸본에 정착하고 고구려를 세운 주몽(朱蒙)과 혼인하였다.
주몽이 나라의 기초를 마련하고 창업을 할 때 커다란 내조를 하였고, 주몽은 비류와 온조를 극진히 대우하였다. 그러나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혼인한 예씨(禮氏)의 아들 유류(儒留)[일명 유리(類利)]가 오자 유류를 태자로 삼아 뒤를 잇게 하였다. 이에 비류가 온조에게 “처음 대왕께서 부여의 난을 피하여 이곳으로 도망하여 왔을 때, 우리 어머니가 집안의 재산을 기울여 가며 도와 방업(邦業)을 이루니 그 노고가 많았다. 그런데 대왕께서 돌아가시자 국가가 유류에게 속하게 되었으니, 우리가 쓸모없이 이곳에 있는 것이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땅을 택하여 따로 국도(國都)를 세우는 것만 같지 못하다.”라고 하였다. 비류와 온조는 무리를 이끌고 패수와 대수를 건너 남쪽으로 와서 미추홀에 정착하였다.
비류의 기록에 앞서 나오는 온조왕의 신화는 그 내용이 조금 다르다. 백제의 시조 온조왕은 아버지가 추모, 혹은 주몽이라고도 한다. 주몽은 북부여에서 난을 피하여 졸본 부여에 이르렀는데, 아들이 없고 딸만 셋이 있던 부여의 왕이 주몽의 비범함을 보고 둘째 딸을 시집보냈다. 부여왕이 죽고 주몽이 뒤를 이었고 주몽은 비류와 온조, 두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이후 비류와 온조가 남쪽으로 내려오는 일은 대동소이하다.
남쪽으로 내려와서 비류는 바닷가에 거주하기를 원하여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지금의 인천광역시]로 가서 터를 잡았고, 온조는 하남 위례성(河南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십제(十濟)라 하였다. 비류가 정착한 미추홀은 토지가 습하고 물에 소금기가 있어 편히 살 수 없었다. 비류가 돌아와 위례성을 보니 도읍이 안정되고 백성들이 편안히 살고 있으므로 부끄러워하며 뉘우치다가 죽었고, 비류의 백성은 모두 위례성으로 돌아왔다. 그 후 온조는 국호를 백제(百濟)로 고쳤다.
또, 『삼국사기』에는 온조왕 13년(기원전 6)에 ‘왕의 어머니가 죽었는데 나이가 61세였다(十三年 春二月 王母薨 年六十一歲).’라는 기록이 있다. 왕의 어머니가 소서노를 가리키는 말이라면, 그녀는 기원전 66년에 태어나 기원전 6년까지 살았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