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7000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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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三韓時代 三大 貯水池, 守山堤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남도 밀양시 하남읍 귀명리 |
시대 | 고대/초기 국가 시대/삼한 |
집필자 | 정석태 |
[정의]
경상남도 밀양시에 있는 삼한시대 저수지 중 하나인 수산제.
[수산제의 정의]
수산제(守山堤)는 경상남도 밀양시 하남읍 수산리에서 양동리까지 동서로 길게 구축되어 있던 인공 수리 시설이다. 낙동강 본류의 범람을 막는 4㎞[10리] 대제(大堤)와, 대제 안쪽에 조성되어 하남읍 수산리·귀명리와 초동면 금포리·검암리 사이 둘레 12㎞[30리]에 이르는 광활한 들판에 물을 대던 관개용 저수지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김제의 벽골제, 제천의 의림지와 함께 삼한시대 축조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관개용 저수지 중 하나다.
수산제에는 근대 농지정리 과정에서 사라졌지만 수산제 내외를 관류하며 주요 수로 역할을 했던 용진강(龍津江)이 흐르고 있었고, 대제 중간에는 방수(防水)와 배수(排水)를 원활하게 할 수 있는 견고한 수문이 설치되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대제 안쪽 들판을 개간하여 대규모 국영농장 국농소(國農所)를 설치하였다가, 임진왜란으로 파괴된 뒤 버려져 국농호(國農湖)로 바뀌었기 때문에 아직도 이 지역을 ‘국농호’ 또는 ‘궁노수’라고 부르고 있다. 옛 관개용 저수지와 관련된 유적 ‘댓섬[竹島]’과 ‘자라목[鼇山]’ 등의 지명이 남아 있다. 조선 초기 국농소 설치 운영 과정에서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수문이 발견되어 1990년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밀양 수산제 수문(密陽守山提水門)은 1990년 12월 20일 경상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수산제의 기원]
수산제는 치수(治水)와 관개(灌漑)를 겸한 독특한 형태의 수리 시설이자 대규모 농장이었다. 바깥으로 낙동강이 낙동강의 지류 용진강, 곧 안강을 통하여 범람하는 것을 막는 큰 제방을 축조하고, 안쪽으로 또 다른 둑을 만들어 낙동강이 범람 또는 역류하며 안강을 통하여 밀려들어 온 물과 덕대산(德大山)·구령산(龜齡山) 등 배후 산지에서 안강을 통하여 흘러내린 물을 가두어 두었다가 낮은 지대의 개간 농경지로 관개하였다. 바깥 제방 중간 다소 지대가 낮은 곳에는 자연 암반을 이용한 견고한 수문을 만들었다. 안쪽의 물이 넘칠 때 안강을 통하여 낙동강으로 흘려보내거나 바깥 낙동강 물이 안강을 통하여 범람하는 것을 막는 과학적인 설비였다.
수산제 안쪽을 대규모 농경지로 개간한 기록은 고려 후기 김방경(金方慶)의 둔전(屯田) 개발이 처음 등장한다. 원나라의 일본 정벌에 필요한 군량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魏志東夷傳)」의 변진(弁辰) 24국 중 미리미동국(彌離彌凍國)을 수산제와 같은 큰 ‘물둑[彌凍]’, 곧 큰 제방을 가진 밀양으로 비정한다면 기원을 삼한시대까지 높여 볼 수 있다.
신라가 가야를 정벌할 때의 전초기지로 지은 이궁대(離宮臺) 등 여러 유적이 남아 있어 수산제 둔전 개발의 역사가 고려 후기보다 훨씬 이전 신라의 가야 정벌 시기로 올라갈 가능성을 높여 준다. 당시에도 신라의 가야 정벌에 필요한 군량의 확보가 절실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신라 당시 둔전을 가능하게 한 수산제와 같은 낙동강 범람을 막는 큰 제방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고려 후기 김방경의 수산제 둔전 개발]
고려 후기 김방경은 원나라가 일본을 정벌할 때 고려 장수로서 1274년 1차 정벌과 1281년 2차 정벌에 모두 참전하였다. 특히 김방경은 1272년에 이미 몽고 정부에 의하여 동남도도독사(東南道都督使)에 임명되어 현지에 내려가서 둔전 개발과 함선 건조 등 일본 정벌을 위한 준비를 적극 지휘하였다. 김방경은 일본 정벌군의 발진 기지였던 창원 합포만(合浦灣)에서 가까운 밀양 수산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수산제 제방을 수축하고, 안쪽으로 확보된 넓은 황무지를 군사를 동원하여 둔전으로 개발하여 필요한 군량을 확보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수산제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수산현(守山縣)에 있는데 둘레가 8㎞[20리]이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고려 김방경이 이 둑을 축조하여 밭에 물을 대서 일본을 정벌하기 위한 군량을 갖추었다’고 한다.”라고 전한다.
『밀주구지(密州舊誌)』에는 “수산제는 수산현 북쪽 0.78㎞[2리]쯤에 있는데 세상에서 국농소라고 한다. 둘레가 12㎞[30리]이다. 세모마름, 연, 마름, 귀리가 멀리까지 가득하였다. 그 가운데 댓섬과 자라목이 있는데, 세상에서 전하기를 ‘신라 왕이 이궁에 유행(遊幸)하여 배를 타고 노닐던 곳이다’라고 한다. 뒤에 고려 김방경이 원나라의 명으로 일본을 정벌할 때, 이 자리에 주둔하면서 장제(長堤)를 증축하여 군량을 삼으려고 하였지만, 토질이 모래흙이라 끝내 이루지 못하였다.”라고 전한다.
이보다 앞서 세종 때 편찬한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와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도 수산제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태종 때 지은 변계량(卞季良)의 시에서도 “수산의 못 물은 천 자나 깊다[守山澤水深千尺]”라고 한 것을 볼 때, 고려 후기 김방경이 수산제를 수축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밀주구지』 기록의 차이로 제방의 신축·증축 여부와 둔전 개발의 성공·실패 여부는 확정할 수 없다.
수산제 일원은 변진 미리미동국과 신라 추화군(推火郡) 이래 밀양 배후 대규모 농경지가 위치한 지역이다. 조선시대에도 여전히 수산현으로 속현의 지위를 유지하였다. 수산제 일원에 일찍부터 낙동강의 범람을 막는 제방이 축조되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밀주구지』 기록에서처럼 고려 후기 김방경이 전래의 장제를 증축하여 안쪽으로 확보된 넓은 황무지를 둔전으로 개발하였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나아가 전래의 장제를 미리미동국이란 이름이 붙게 된 ‘물둑’과 연계지어 본다면, 수산제의 기원은 삼한시대로 끌어올려 볼 수 있고, 또 제방 축조를 통하여 안쪽으로 확보된 넓은 황무지를 둔전으로 개발하려는 시도는 신라의 가야 정벌 시기 등 고려 후기 김방경 이전에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국농소 설치와 운영]
조선은 초기에 고려 이래의 모든 둔전을 폐지하였다가, 1409년 평주(平州)·배천(白川)·예산(禮山) 등 몇 군데 국둔전(國屯田)을 복설하였다. 1426년(세종 8) 지방 둔전의 폐단이 심하여 다시 각도의 관둔전과 국둔전을 모두 혁파하였다. 그러다가 1461년(세조 7) 『경국대전(經國大典)』으로 법제화함에 따라 각도에 산재한 황무지를 가려서 또다시 국둔전을 설치하였다. 이에 따라 밀양 수산 국둔전도 오랫동안 황무지로 버려져 있던 것을 다시 개발하게 되었다.
1463년 호조판서 조석문(曺錫文)의 건의로 수산제를 국농소로 정하고 수전(水田) 200여 결(結)을 개간한 다음, 밀양부사를 감농관(監農官)으로 삼고 경내의 낙동강 선군(船軍)을 동원하여 경작하였다. 하지만 해마다 강물이 범람하는 데다 인력 부족과 농사의 실기로 소기의 수확을 할 수 없었다. 1465년(세조 11) 사용 배경흥(裵敬興)이 전농시에서 감농관 1인을 파견하여 경작하면 연간 1만 석을 수확할 것이라는 건의를 하였다. 1467년(세조 13) 경상도체찰사 조석문은 옛 제방에 붙여서 양동역(良洞驛) 앞쪽에 새 제방을 증축하여 농경지 면적을 늘리는 한편, 옛 제방과 새 제방 사이 지대가 낮은 곳에 자연 암반을 이용한 수문을 만들어 안쪽의 물이 넘칠 때 안강을 통하여 낙동강으로 흘려보내고, 바깥 낙동강의 물이 안강을 통하여 범람하는 것을 막을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조정에 밀양부 관노(官奴) 70여 명에게 경작을 하게 하고, 성현찰방에게 감농관을 겸임하도록 건의하였다. 그 결과 1467년에는 1만 석에 가까운 수확을 올리게 되었다. 당시의 경과를 알려 주는 것이 바로 김종직(金宗直)의 시 「서수산회축(書守山會軸)」 서문이다.
“수산은 밀양부의 속현이다. 수산에 200여 경이 되는 못이 있는데, 전하는 말에 의하면 고려시대 김방경이 왜국을 정벌할 때에 축조하여 영전(營田)에 물을 대던 것이라고 한다. 1463년(세조 9)에 호조에서 헌의하여 둑을 터 버리고 국농소로 만들었지만, 해마다 강물이 범람하여 수확이 아주 적었다. 그러자 1467(세조 13)년 봄에 우찬성 조석문이 경상도체찰사로 왕명을 받들어 순시할 때, 둑을 더 넓혀 쌓고 수문을 만든 다음, 둑 안팎에 산대와 버드나무를 심었다. 당시 부사는 형조참판 정난종(鄭蘭宗)이고, 종사관은 훈련첨정 권정(權侹)과 호조정랑 김순명(金順命)이었다. 그리고 밀양부사 윤호(尹壕), 김해부사 경유순(慶由淳), 대구부사 김원윤(金元潤), 양산군수 유백손(柳伯孫), 창원부사 민규(閔奎), 청도군수 윤제(尹堤), 창녕현감 이찬(李纘), 현풍현감 황사형(黃事兄), 영산현감 신윤원(申允元)이 각각 자기 고을의 인부들을 거느리고 와서 둑을 쌓았다. 도사 성숙(成俶)과 김순명이 실제로 공사를 감독하여 열흘 만에 마쳤다.”
경상도체찰사 조석문의 총지휘하에 밀양부사를 위시한 인근 8개 고을 수령이 인부를 이끌고 와서 10일 만에 공사를 마쳤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시에서 “옛 둑에다 새 둑을 붙여 여분처럼 만들었네[舊堰新堤擬汝墳]”라고 한 것을 통하여 옛 제방에 붙여서 새 제방을 축조한 사실도 알 수 있다. 옛 제방은 지금의 하남읍 수산리와 초동면 금포리 사이에 있던 종래의 제방을 말하는 듯하고, 새 제방은 양동역 앞쪽으로 옛 제방에 붙여서 증축한 것을 말하는 듯하다. 그리고 옛 제방과 새 제방 사이 지대 낮은 곳에 자연 암반을 이용한 견고한 수문을 만들어서, 안쪽의 물이 넘칠 때 안강을 통하여 낙동강으로 흘려보내고, 바깥 낙동강의 물이 안강을 통하여 범람하여 오는 것을 막을 수 있게 하였다. 지금 수산제역사공원에 있는 수산제 수문일 것이다. 이렇게 하여 하남읍 수산리에서 양동리까지 동서로 길게 구축되어 낙동강 본류의 범람을 막는 4㎞[10리] 대제에 견고한 수문까지 갖춘, 하남읍 수산리·귀명리와 초동면 금포리·검암리 사이 둘레 12㎞[30리] 198만 3480㎡[200여 경(頃)]의 광활한 수산국농소가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공사에도 불구하고 수산국농소의 운영은 순조롭지 않았다. 거의 해마다 낙동강이 범람하여 침수 피해가 계속된 데다 병사나 관노 등 경작할 인력의 확보와 감농의 어려움 때문에 소기의 수확을 올릴 수 없었다. 1477년(성종 8) 무렵 밀양부사의 건의로 수산국농소의 경지 반은 세조의 원찰 봉선사(奉先寺)에 헌납하고, 반은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어 병작반수의 전지로 삼았다. 1487년(성종 18) 무렵 봉선사에 헌납한 토지를 돌려받아 국농소를 다시 설치하고 수산제 근처 선군 500명으로 하여금 경작하게 하였다. 그 뒤에도 운영이 제대로 되지 않다가 1500년대 초반에야 안주국농소, 인산국농소와 함께 연간 1만여 석의 수확을 올리는 조선 3대 국농소의 하나가 되었다.
이후 1592년 임진왜란으로 수산제가 파괴되면서 국농소의 넓은 들판은 범람한 낙동강 강물과 산지에서 흘러내린 개울물로 연과 마름 등이 가득한 넓은 소택지(沼澤地)로 변하였다. 수산국농소를 ‘국농호’ 또는 ‘국농소’로 일컫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특히 임진왜란으로 낙동강의 범람을 막던 바깥쪽 제방이 사라지면서 수산 일원은 거의 매해 수해를 겪는 상습 침수 지역이 되었다. 숙종 연간 홍수에 해일까지 겹쳤던지 갑자기 낙동강이 범람하여 수산 일원을 덮쳤을 때, 김기(金淇)가 수산창(守山倉)을 불태우고 종을 난타하여 들판에서 일하던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건진 일은 조선 후기 상습 침수 지역으로 변한 수산 일원의 모습을 잘 보여 준다.
[근대 경지 정리와 하남평야]
수산 일원의 소택지가 비옥하고 광활한 하남평야(下南平野)로 변한 것은 근대 이후의 일이다. 1913년 일본 낭인 도야마 미쓰루[頭山滿]가 조선총독부의 비호 아래 수산 일원 소택지와 황무지 간척권 및 개간권을 받아 내어 친일 부호 민병석(閔丙奭) 외 2인에게 막대한 권리금을 받고 팔아넘기면서 개발이 시작되었다. 민병석은 1913년 1차로 국농호를 중심으로 공유 수면과 황무지 등을 간척하여 133만 8849㎡[135정보]의 논을 만들고, 1914년부터 1927년까지 13년 동안 국농호 바깥 황무지를 개간하여 134만 8766㎡[136정보]의 논을 만들었다.
1923년 하남수리조합(下南水利組合)이 설립되어 현대 토목 기술에 의한 제방을 축조하고, 관개와 배수를 과학적으로 하여 지금과 같은 전천후 농지가 되었다. 당시 조선총독부 기록에 의하면, 하남수리조합 설립 당초 몽리 면적은 1862만 4877㎡[1,878정보]였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옛 국농소의 개간 농지는 소출이 가장 좋은 논이 되었다. 지금의 초동면 금포리와 하남읍 수산리, 양동리, 귀명리, 대사리, 파서리, 명례리, 백산리 등 낙동강 가의 상습 범람 지역은 비옥하고 광활한 하남평야를 이루어 경상남도에서 가장 소출이 높은 곡창지대로 바뀌게 되었다.
[수산제역사공원의 교육 및 관광자원으로의 개발 가능성]
수산제는 바깥으로 낙동강의 범람을 막는 큰 제방을 설치하고, 안쪽으로 또 다른 둑을 만들어 낙동강에서 밀려들어 온 물과 덕대산·구령산 등 배후 산지에서 흘러내린 물을 가두어 두었다가 낮은 지대 농경지에 물을 대던 치수와 관개를 겸한 독특한 형태의 수리 시설이자 대규모 농장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수리 시설 겸 대규모 농장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에서 근대 이전 농경문화의 발달사를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끊임없이 범람하는 강물과 맞서 싸우며 농경지를 일구어 온 근대 이전 지역 사람들의 치열한 삶의 역사와 치수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2022년 밀양시에서는 이미 발굴한 수산제 수문을 중심으로 수산제역사공원을 조성하였다. 수산제역사공원은 수산제의 역사, 수산제 수문과 관련한 가상 체험관, 밀양 농업의 과거와 현재, 농경문화 유물관과 체험관 등 여러 주제의 홍보관을 갖추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