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7006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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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大池 |
영어공식명칭 | Kim Daeji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남도 밀양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하유식 |
출생 시기/일시 | 1891년 10월 7일 - 김대지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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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908년 - 김대지 사립 동화학교 입학 |
활동 시기/일시 | 1913년 경 - 김대지 항일 운동 조직 일합사 설립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 김대지 중국 동삼성으로 망명 |
활동 시기/일시 | 1920년 - 김대지 베이징[북경]에서 북경군사통일회 발기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21년 - 김대지 북경군사회의 내무총장에 선임 |
활동 시기/일시 | 1926년 경 - 김대지 민족유일당 운동 전개 |
몰년 시기/일시 | 1943년 10월 26일 - 김대지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63년 - 김대지 대통령 표창 추서 |
추모 시기/일시 | 1980년 - 김대지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03년 - 김대지 경상북도 경주시 건천읍 송선리 산88에 가묘 조성 |
출생지 | 내이동 - 경상남도 밀양시 내이동 847 |
활동지 | 중국 - 중국 랴오닝성 |
활동지 | 중국 - 중국 지린성 |
활동지 | 중국 - 중국 헤이룽장성 |
활동지 | 중국 - 중국 베이징 |
묘소 | 김대지 묘소 - 경상북도 경주시 건천읍 송선리 산88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임시정부 내무부 위원|의열단 고문|북경군사회의 내무총장 |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밀양시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김대지(金大池)[1891~1943]의 호는 일봉(一峰) 이다. 1891년 10월 7일 지금의 경상남도 밀양시 내이동에서 아버지 김경수(金景守)와 어머니 정라(丁羅)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아내는 부호 박노인의 큰딸 박선이이며, 4남 2녀의 자식을 두었다.
[활동 사항]
김대지는 1908년 근대 학교인 사립 동화학교에 입학하여 수학하였고, 졸업 후 동화학교 교사가 되어 후학을 양성하였다. 1913년 무렵 일우(一友) 구영필(具榮必), 일몽(一夢) 이수택(李壽澤), 황상규(黃尙奎), 명도석, 안곽, 윤치형 등과 함께 항일운동 조직으로 일합사(一合社)를 설립하였으며, 대한광복단에 가입하여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였다. 지린[吉林]과 펑톈[奉天] 등을 왕래하면서 비밀결사 단체 조직을 모색하던 중 1918년 5월 일경에 체포되어 징역 4월형을 언도받고 평양 감옥에서 복역하였다.
김대지는 1919년 중국 동삼성 망명 후 동삼성 독립운동자 대표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의정원 의원, 내무부 9인 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이후 의열단 조직에 고문으로 참여하여 지도하였으며, 요인 암살, 폭탄 투척 의거 등에 관여하는 등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1920년 베이징으로 가 북경군사통일회를 발기하였으며, 1921년 북경군사회의에서 내무총장에 선임되기도 하였다.
1926년 무렵 만주 융안현[永安縣] 닝구타[寧古塔]에서 정의부, 참의부, 신민부의 통합을 목표로 민족유일당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오랜 병마로 고생하다가 1943년 10월 26일 헤이룽장성 아성현 취원창에서 5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저술 및 작품]
김대지는 독립운동 방략이 집약된 「합사진행책(合社進行策)」을 기초하였다.
[묘소]
취원창에 있는 김대지의 묘소가 훼손되어 유족들이 2003년에 경상북도 경주시 건천읍 송선리 산88의 신선사 옆에 가묘를 조성하였다.
[상훈과 추모]
김대지는 1963년 대통령 표창, 198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