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5010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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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樓亭 |
영어공식명칭 | Pavilion |
이칭/별칭 | 정루 |
분야 | 생활·민속/생활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북도 무주군 |
집필자 | 남해경 |
[정의]
전라북도 무주군 지역에 있는 누정.
[개설]
누정(樓亭)은 누각(樓閣)과 정자(亭子)를 함께 일컫는 말로 정루(亭樓)라고도 한다. 누정은 살림집과 달리, 주변의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조망할 수 있도록 건립한 것이 특색이다. 그래서 누정 건축은 사방이 탁 트인 구조로 되어 있거나 아니면 중앙이나 한쪽에 방이 위치하지만 주로 대청마루로 되어 있다. 누정은 궁실을 위한 원림(園林)의 조성과 군신 간의 유휴 장소로 건축되기 시작하여 후대에 사대부들이 풍류로 즐기는 장소로 발전하게 되었다.
누정의 유형은 위치에 따라서 경관이 좋은 산이나 언덕 위에 위치하여 산을 등지고 앞을 조망할 수 있게 되어 있는 유형과 냇가, 강가 또는 호수나 바다 등에 면하여 세워지는 유형, 창덕궁(昌德宮) 후원에 있는 비원(祕苑)과 같이 궁실의 후원 등에 건축되는 유형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외에 들판 주변에 지어 농부들이 일을 하다가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누정도 있는데 이는 ‘모정(茅亭)’이라 하여 누정과 구분하기도 한다. 그리고 드문 경우이지만 변방 또는 성터에 건립되어 병사(兵舍)로 사용했던 누정도 있고 향약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누정도 있다. 그렇지만 이들 유형은 자연을 조망하고 즐기기 위하여 건축되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무주군의 누정]
전라북도 무주군에는 무주읍에 한풍루(寒風樓)[전라북도 유형 문화재 제19호]와 돈세정(豚世亭), 무풍면에 풍호정(風乎亭), 설천면에 서벽정(棲碧亭)[전라북도 기념물 제80호], 안성면에 초려정(草慮亭), 적상면에 사유정(四柳亭) 등 6동의 누정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현재는 한풍루와 서벽정만이 남아 있다. 무주의 대표적인 누정 6동은 자연을 벗 삼아 주변 경관을 즐기면서 학문을 닦거나 시를 읊으면서 후학을 양성하는 기능을 지니고 있었다. 한풍루의 본래 기능은 관아에 속하면서 주변 천의 경관을 즐기기 위해 건축되었지만 돈세정, 서벽정, 초려정은 후학을 양성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돈세정과 사유정은 선비들이 시를 읊고 학문을 논하던 기능도 지니고 있었다. 풍호정은 보기 드물게 향약을 위해서도 건축되었다. 이처럼 무주의 누정은 누정 건축이 가지는 기능을 수행하면서 다양한 형태로 건축되었다.
1. 한풍루
한풍루는 전라북도 무주군 무주읍 당산리 무주 지남 공원 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호남 최고의 누각이라고 전해진다. 전주의 한벽당(寒碧堂), 남원의 광한루(廣寒樓)와 더불어 삼한(三寒)이라고 한다. 2층으로 된 누각 건물로 1층은 정면 3칸 측면 4칸, 2층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되어 있다. 구조는 1층은 가공된 방형 주초 위에 두리기둥을 세웠고, 2층은 두리기둥 위에 창방을 결구했으며, 지붕은 팔작지붕에 겹처마 양식이다.
한풍루는 본래 무주의 관아 앞 남대천(南大川) 변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599년(선조 32) 현감(縣監) 임환(林潁)이 복원하였으며, 이후 1646년(인조 24), 1678년(숙종 4), 1729년(영조 5), 1731년(영조 7)에 중수되었다. 1910년 이후에는 불교 포교당과 학교 공작실 등으로 사용되기도 하고 충청북도로 팔려가 ‘금호루’라는 현판이 걸리는 수모를 겪기도 하다가 1971년 현 위치에 복원되었다.
2. 돈세정
돈세정은 단종(端宗) 때 현감이던 박인정(朴仁挺)이 사육신(死六臣)이 불행을 당하자 벼슬을 버리고 서호로 들어와 살면서 짓게 되었고, 이후 참의(參議) 유연(柳連)이 들어와 박인정이 지었던 정자 터에 누정을 세우고 박인정의 후손 박이겸(朴以謙), 박이항(朴以恒) 등과 강론하고 시를 짓고 읊었던 곳이다.
3. 풍호정
풍호정은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 철목리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언제 처음 지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단지 풍호 향약에 의해서 운영되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4. 서벽정
서벽정은 1886년(고종 23)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이 낙향하여 선비들과 시국을 논하고 후진을 양성하던 곳이다. 송병선은 송시열(宋時烈)의 9세손으로 학문과 절제된 행동으로 대사헌(大司憲)에 이르렀으나 취임하지는 않았다. 서벽정은 송병선이 무주 구천동에 놀러 왔다가 아름다움에 반하여 수성대(水城臺)에 정자를 건축하고 머물던 곳이다. 이 일대는 천혜의 절경을 이루어 주자(朱子)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본떠 각 계곡을 ‘무계 구곡(武溪九曲)’이라 불렀는데 그중 4곡인 일사대(一士臺)에 위치하고 있다. 일사대는 본래 ‘수성대’라고 부르던 곳이었는데, 이 고장 사람들이 송병선의 학리를 보고 그를 ‘동방일사(東邦一士)’라고 하면서 그가 사는 곳이라 하여 ‘일사대’라 했다고 한다.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된 건물로 중앙 2칸은 대청으로 되어 있고 좌우측 1칸은 전면에는 누마루, 후면에는 방을 들였다. 구조는 1단의 자연석 낮은 기단 위에 방형으로 가공된 주초를 놓고 방형 기둥을 세운 다음 창방과 결구하고 있다. 지붕은 겹처마에 팔작지붕 양식이다. 일반적인 누정이라기보다는 강학을 위한 공간처럼 보인다. 서벽정은 한때 화재로 소실되었던 것을 1891년(고종 28)에 재건했으며 6·25 전쟁 당시에는 북한군의 숙영지 역할도 하였다. 내부에는 주자와 송시열의 초상을 봉안했었다.
5. 초려정
초려정은 전라북도 무주군 안성면 장기리 단지봉(丹芝峯) 아래에 위치하고 있었고, 1657년(효종 8)에 이유태(李惟泰)가 벼슬을 버리고 와 후진을 양성하던 곳이다. 이유태는 천석 위에 서재를 짓고 자신의 호를 따서 ‘초려정’이라 명명하고 학자들과 학문을 닦았다고 한다. 1967년 수해로 유실되었다.
6. 사유정
사유정은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 삼유리 상유 마을에 위치하고 있었고, 유산(柳山)과 유수(柳壽)가 시를 읊던 곳이다. 현재는 헐리어 기념비만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