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6025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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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음역 | Namwon dojagiwa Onari noraetap |
영어의미역 | Namwon Ceramics and Onari Monument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전라북도 남원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서정섭 |
[개설]
남원이 유서 깊은 도자기 고장이었다. 정유재란 때 남원의 많은 도공들이 일본으로 끌려가 생활해야 했고, 그 곳에서 일본의 도자기 수준을 향상시켰다. 일본으로 끌려간 도공들이 고향 남원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 불렀으며 지금까지도 불리고 있는 노래가 오리 노래이다. 1994년 남원문화원에서 이 역사적 사실을 널리 알리기 위해 오리 노래탑을 세웠다.
[남원과 정유재란]
남원은 전라도의 관문으로 일본군이 조선을 침략하여 북상하는데 꼭 확보해야 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조선이나 일본 모두 남원을 확보, 점령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일본군은 임진왜란 때 패배한 것은 전라도 지방을 점령하지 못한 데 있다고 판단하여 정유년 재침 시에는 전라도 지방을 점령한 후 한양으로 진격할 계획을 세웠다.
1597년(선조 30) 7월 말 전라도 지방을 점령한다는 작전에 따라 왜군 11만 명이 좌·우군으로 나뉘어 우군은 경상남도 거창군의 황석산성을, 좌군은 남원을 공격하였다. 조정에서도 전라도와 충청도를 지키는 전략상 중요한 요충지인 남원의 방어가 매우 절실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당시 남원에는 전라병사 이복남, 광양현감 이춘원, 조방장 김경노의 군사와 중국 명나라의 부총병 양원(楊元)의 3천 군사가 있었다. 전운이 감도는 8월 7일, 삼복의 무더위 속에서 일본군 선봉대 모습이 나타났다. 8월 13일, 일본군의 주력군이 남원성을 포위하여 공격하기 시작했다.
전투 2일째인 8월 14일, 일본군의 쉼 없는 공격으로 성의 동남을 지키던 병사들이 많이 전사하였다. 일본군이 12시쯤 총과 포를 쏘면서 성으로 돌진하여 맹렬하게 공격하였다. 이복남·신호·김경노 등이 병력 1천 명을 이끌고 성문을 열고 나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다음날 이틀간의 공격에 지친 일본군은 화해를 요청하면서 명나라 장수 양원을 만나자고 하였다. 양원은 일본군 병사 5명을 용성관 처소에 들어오게 하고 일본군 사령관의 결심을 전달받았다. 그러나 양원은 “내가 천하를 횡행하였으며 싸워서 이기지 못한 전쟁이 없었다.”고 기세당당하게 꾸짖어 일본군 병사를 돌려보냈다.
날이 밝아 8월 16일이 되었다. 이 날은 사실상 남원성 최후의 날이었다. 혹독한 더위와 3일간의 격전에 지친 일본군은 싸움이 지구전에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단기간에 싸움을 마무리하기 위해 전 병력을 투입하여 마지막 돌격을 감행하였다. 아귀처럼 쳐들어오는 일본군에 맞서 침식도 잊은 채 남원의 민·관·군은 혼연일체가 되어 싸웠다. 그러나 남원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남원 사람들은 왜군 56,000여 명을 맞아 참담한 패배를 맛보아야만 했다. 이복남이 이끈 1,000여 명, 양원이 이끈 3,000여 명, 그리고 성안에 있던 주민 6,000여 명 등 총 10,000여 명이 죽었다. 참으로 처참한 전쟁이었고, 우세한 일본군에 굴복하지 않은 혈전이었으며, 조선인의 기개가 빛난 싸움이었다.
[만인의총]
전쟁이 끝난 후 순절한 시신을 한곳에 모아 합장하였다. 그 후 1612년(광해군 4) 충렬사를 건립하여 외국 사신을 접대하던 접반사 정기원 등 8충신을 받들었다. 처음 이 묘지는 남원역 부근에 있었으나 1964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또 19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이 만인의총 정화를 마치고 쓴 휘호가 이곳에 있다. 기념관에는 당시의 유물이 보관되어 있는데, 남원성에서 왜군 5만 6천여 명과 혈전 분투하는 전황 기록화 4폭과 충신들의 기행록과 유품 등이 있다.
만인의총의 실상을 알 수 있는 정유재란 당시의 참상을 기록한 책이 있음을 알리는 신문 기사가 있다. 1995년 11월 21일 『조선일보』는 ‘정유재란 참상 기록 일인문서 공개’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정유재란 당시 군의관으로 참전했던 일본 승려가 전쟁의 참상을 기록한 문서가 400년 만에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공개됐다. 동국대 신용태 교수(일본학연구소장)는 21일 1597년 정유재란 당시 일본 안요지사 주지 게이넨 승려가 기록한 문서 「일일기」를 공개했다. 게이넨은 1597년 6월 24일부터 이듬해 2월 2일까지 일본 큐슈의 우스키성 성주의 군의관으로 전쟁에 참가했다.
이 문서는 일본 오카야마대 사학과 나이토 쉰포 교수가 지난 1958년 일본 조선학회에서 발간하는 『조선학보』 35집에 「조선일일기」라는 제목으로 해설과 함께 3백 60년 만에 처음 공개한 바 있으나 우리말로 소개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문서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왜군은 경상도 하동 근처에 처음 상륙, 전라도 남원을 거쳐 전주에 진입해 머물러 있다가 충청도 진천에 이른다. 그 후 퇴각 명령에 따라 경상도 상주로 내려와 한동안 머물렀고 이어 영천을 거쳐 경주까지 퇴각한다.
그 후 울산으로 내려와 한동안 머물렀고 서생포를 거쳐 부산에 도착하며, 일본 대마도, 이끼섬 등을 거쳐 일본으로 돌아갔다. 이 과정에서 게이넨 스님은 싸움터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참상, 이를 본 심경 등을 시를 통해 읊거나 일기체로 기록했다.
8월 6일자 기록에는 ‘들도 산도 섬도 모두 불태우고 사람을 쳐죽인다. 그리고 산사람은 금속 줄과 대나무 통으로 목을 묶어서 끌어간다. 어버이 되는 사람은 자식 걱정에 탄식하고 자식은 부모를 찾아 헤매는 비참한 모습을 난생 처음 보게 됐다. 들도 산도 불 지르는데 혈안이 된 무사들의 소리가 시끄럽고 마치 아수라장을 방불케 하는 비참한 광경이구나’라고 기술돼 있다.
또 8월 8일자 기록에는 ‘조선 아이들은 잡아 묶고 그 부모는 쳐죽여 갈라놓으니 다시는 볼 수가 없게 된다. 남은 부모 자식의 공포와 탄식은 마치 지옥의 귀신이 공격해 오는 때와 같이 공포와 서러움 속에서 몸을 떨고 있다.’고 적혀있다.
문서를 번역한 신용태 교수는 ‘이 문서는 승려 신분인 기록자가 전쟁의 참상을 안타까워하거나 남의 나라에 와서 살상 행위를 하고 있는 자국의 행동을 비판적으로 기술한 내용이 대부분’이라면서 ‘당시의 상황을 기록한 문서가 거의 없기 때문에 이 문서는 임진왜란사 연구에도 중요한 사료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 얼마나 엄청난 사실인가. 일본인이 보고도 차마 이해할 수 없을 정도였으니 당시의 참혹함을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 더구나 하동, 남원, 전주, 진천으로 이어진 참상이었으니... 남원의 만인의총이 바로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 도공들]
그런데 이때의 참패는 여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일본은 당시 조선의 온갖 문화재와 각종 기술자들을 일본으로 가져가거나 잡아갔다. 특히 일본군 장수 시마즈 요시히로[都津義弘]는 조선인 주가전(朱嘉全)의 안내를 받아 남원성 전투 후 성안에 남아 있던 도공 70여 명을 포로로 잡아갔다. 일본군은 조선의 장인을 닥치는 대로 일본으로 끌고 갔다. 도공, 목공, 인쇄공 등 손재주를 가진 모든 사람을 납치하였던 것이다.
일본 역사에서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도자기 전쟁이라고 부른다. 조선의 도공들은 약간의 흙과 유약을 가지고 다도해를 거쳐 대한해협의 겨울 파도를 지나 큐수 남단, 지금은 가고시마로 불리는 사쓰마 해변에 도착했다.
가고시마현 나에시로가와 마을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그러한 사람들 가운데 심수관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초대 심수관을 실은 3척의 배가 거센 풍랑을 만나 심당길과 42명의 도공이 탄 배가 시마비라 포구에 도착하였다. 심당길 일행이 도착한 사쓰마의 남단은 황무지였다.
[가고시마 사쓰마에 정착]
조선 도공들은 논밭을 갈며 가마를 만들어 도자기와 옹기를 구웠다. 이들이 만든 물독은 일본 부엌의 혁명을 가져왔다. 화산재가 뿜어져 나오는 가고시마 사쓰마 지역의 땅은 화산재로 덮여 있어 철분이 많은 흑토밖에 없었다. 사쓰마 어디에도 단아한 백자를 탄생시킬 흙은 없었다. 당연히 심당길 일행은 생활 용기로 눈을 돌렸다. 그 때까지 대다수 용기들을 나무로 만들어 쓰던 일본 사람들에게 검은 빛 질그릇은 생활의 일대 변화였고 놀라운 신소재였다.
사쓰마 도자기는 흑과 백의 두 가지로 구분된다. 검은 도자기는 서민의 생활 용기였고, 흰 도자기는 지배층 전용 용기였다. 조선 도공들이 빚어 낸 도자기는 가치를 더해 가면서 보물처럼 승격되어 갔다. 이러한 것을 시기한 일본인들은 조선 도공들을 학대하였다.
학대를 피해 조선 도공들은 1603년 어느 날 한밤중에 사흘간을 걸어 대나무 숲이 우거진 나에세로가와에 도착하였다. 일본의 기록에는 그때의 정황을 ‘촌민들의 늑대같은 습격을 피해 나에세로가와에 피난했다’고 전하고 있다. 그렇게 새로운 정착지를 정했다. 사쓰마 번주 시마즈가 이 소식을 듣고 조선 도공들을 괴롭히는 행위를 금하게 하였다.
여기서 나온 도자기가 고가품으로 일본 귀족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사쓰마 번주를 비롯한 일본의 지배층들은 조선의 백자와 같은 희디 흰 백옥의 도자기를 선망하고 있었다. 1676년 잡혼 금지령은 조선 도공의 순수한 피를 이어 가려는 뜻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조선 도공들은 순수한 한국 혈통을 이어갔다.
400년 동안 수많은 시련을 겪으면서도 그들은 한국의 혈통과 한국의 얼을 꿋꿋하게 간직했고, 12대 심수관은 유럽까지 유학하여 새로운 기법을 배워 사쓰마 자기의 수준을 높였다. 나에시로가와는 조선인의 도예촌으로 발전하였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시로사쓰마도 이곳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세계적인 사쓰마 자기가 바로 심씨 가문의 것이고, 사가현 가라쓰 자기도 도예의 명문 다까도리도, 하기 아리다 아까노 히라도, 아쓰히로 고시로 자기도 한국인의 후예가 만든 자기라 한다. 오늘날 세계 정상의 일본 도예 명가의 원조는 바로 정유재란 당시 일본으로 끌려간 남원 사람들인 것이다.
[단군신전 다마야마궁 건립]
일본 땅에서 도예의 혼을 사르며 생활하는 동안 그리움이 사무쳐 고향을 잊을 수 없던 조선 도공들은 자신들이 한민족임을 나타내는 단군 묘인 다마야마궁(玉山宮)을 세웠다. 어느 날 밤바다 저편에서 하늘에 떠돌던 커다란 불덩어리[火玉]가 날아오고, 벌집이 계곡의 큰 바위 위에 떨어졌다.
큰 바위는 울며 움직이면서 매일 밤 이상한 빛을 내어 불길이 솟았다. 사람들이 지붕에 올라가서 이러한 광경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하여 무당에게 점을 쳐보았다. 무당은 조선 개국의 신 단군이 마을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온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1907년 신사(神社)를 짓고 단군에게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해마다 음력 9월 14일이 되면 큰 제사를 올리는데, 이때 부르는 노래가 심방곡 「오리 오리소서」이며 우리 음 그대로 부르고 있다. 오노리다 마쓰리[祝祭]이다. 일본으로 끌려간 도공과 그 후손들이 고국에서 불렀던 노래 「오리 오리소서」를 망향의 노래로 불러 40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1988년 7월 26일 광한루원 완월정에서는 이들 도공들의 후예들이 「오리 오리소서」 귀향 음악회를 열었으며 노래의 원 고향인 남원에 다시 돌려주는 전수식을 가진 일이 있다.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남원문화원에서는 1994년 「오리 오리소서」의 역사적 의의와 가치를 재조명하고 남원의 문화적 위상을 드높이기 위해 노래탑을 세웠다.
[오리 노래를 부르며]
「오리」는 많은 악보집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제일 오래된 것은 1572년에 기록된 「금합자보」이다. 1610년 양덕수가 임실현감 김두남의 권유로 남원과 임실에서 불려지는 노래들을 채록하여 편찬한 「양금신보」에도 전하고 있다. 「오리」를 「금합자보」에는 평조 만대엽 곡조라고 하였고, 「양금신보」에는 중대엽 곡조에 속칭 심방곡(心方曲)이라 하였다. 중대엽·만대엽이라는 것은 노래 곡조의 빠르고 느림에 따른 분류법이다.
또 고려 때 궁중의 나례(儺禮) 의식의 하나로 연희되었던 「처용희」에서는 신방곡(神房曲)이라 하였다. 이것을 보면 오리는 고려 때부터 조선 중엽까지 광범위하게 널리 불렸던 노래임을 알 수 있다. 그 가사는 「금합자보」에 실린 것과 「양금신보」에 실린 것이 약간 다르기는 하나 큰 흐름은 유사하다. 노래는 다음과 같다.
오리 오리나/ 일에 오리나/ 져므디도 새디도/ 오리 새리나/ 일 의
오리 오쇼셔 (「금합자보」)
오리 오리쇼셔/ 일에 오리쇼셔/ 졈그디도 새디도 마시고/ 새라난 식에 오리쇼셔 (「양금신보」)
이것을 오늘날의 말로 바꿔보면 이런 뜻이다.
오늘이 오늘이소서/매일 오늘이소서/저물지도 새지도 말으시고/(날이) 새거든
주야장상 오늘이소서
이 노래는 의식의 노래, 오랜 옛날에는 제의에서 불리던 노래였고, 새로 돌아오는 내일은 오늘과 같이 화평한 날이 되게 해달라는 송축의 노래였다. 또 이 노래는 평민층에서부터 궁궐에 이르기까지 계층을 초월하여 널리 불리던 노래였다. 현실을 긍정하고 긍정적인 삶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한 것으로, 기원하고 소망하는 노래였다.
심방은 제주도에서는 무당을 가리킨다. 그래서 「오리」가 무당의 노래인 신방곡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제주도 무가 「세민황제본」이 이와 유사한 형식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오 오 오이라 / 도 좋아 오이여 / 오 오 오이라 / 날도 좋아 오이여 / 매일 장삼 오이민 / 성도언말 가실서냐
이런 노래가 무가로서의 기능적 측면이 약화되면서 잔치와 같은 흥겨운 분위기를 연출하는 노래로 바뀌게 되었을 것이다. 사대부에서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전계층에게서 애호를 받으며 지속적으로 전승되었던 노래로 생각된다. 오늘날 「아리랑」이 민족의 노래로 국민 모두가 애창하듯이, 옛 선조들도 심방곡 「오리 오리쇼셔」를 애창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정유재란의 양란을 당하면서 노래도 잃어가고 아는 이도 사라져 갔다.
[남원 지역의 도요지]
남원 지역의 도자기 공예에 관한 역사는 멀리 가야 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조선 초기에는 지금의 남원시 왕정동 만복사지 뒤 기린산록에 있던 백자 가마가 유명하였다. 특히 정유재란 때 일본에 전해진 도자기 문화는 바로 이곳 남원 지역에서 성행하였던 도자기 문화이다. 지금 남원 지역에서는 예전 도요지를 살펴보고 그 명성을 되찾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다.
1. 요골 도요지: 전라북도 남원시 산동면 대상리 요골마을에서 귀정사로 가는 길을 따라 200m 남짓한 곳의 도로의 우측에 있는 야산에 옛날의 요지 흔적이 보인다.
2. 준향리 도요지: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면 준향리 준향마을에서 축산고등학교로 가는 길을 따라 가다가 큰 길로 들어서기 전 50m 내의 지점, 길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3. 수철 도요지: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면 공안리 수철마을에서 동남쪽의 산내면으로 가는 구도로를 따라 2㎞ 남짓한 곳에 자리하고 있다. 구도로는 거의 흔적을 찾기가 어렵고 주변 지역은 야영장 설치 계획이 마련되어 있다.
4. 문수동 도요지: 전라북도 남원시 이백면 효기리 문수동에서 남쪽으로 200m 지점 문수동 고분군에 인접하여 자리하고 있다.
5. 고기리 도요지: 전라북도 남원시 주천면 고기리에서 정령치로 가는 길을 따라 1.5㎞ 가다 보면 선유폭포에 도착하는데 이 폭포의 남쪽에 인접한 산에 자리하고 있다. 도요지는 길에 접한 산이 구릉에서부터 시작하고 있어 도로의 남측벽에 일부 흔적이 남아 있다.
6. 서재 요지: 전라북도 남원시 금지면 입암리 서재마을에 있는 성의 북쪽, 즉 산의 윗쪽에 자리하고 있다.
7. 평촌 요지: 전라북도 남원시 대강면 평촌리 새터마을의 뒷편 산에 자리하고 있는데 현재 인삼밭으로 경작되고 있어 유구의 확인이 어렵다. 주민들에 의하여 점밭골·점실로 불리고 있는 지역으로 그릇을 만드는 점토가 많이 있다는 점에서 연유된 명칭이라고 한다.
8. 고리봉 요지: 전라북도 남원시 대강면 사석리 석촌마을 고리봉 중턱 약수암에서 해발 708.9m인 고리봉으로 오르는 길을 따라서 0.5㎞ 내의 지점의 산 구릉에 자리하고 있다. 주민들이 원머리산으로 통칭하는 산의 줄기이며, 요의 입구가 일부 노출되어 있다. 이 노출된 입구의 안에는 자기편과 목탄이 가득 있다.
9. 석촌 요지: 전라북도 남원시 대강면 사석리 석촌마을 약수암이 있는 산으로 따라 동쪽으로 있는 해발 200~300m 내외의 밭과 논으로 경작하고 있는 곳에 인접하여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고리봉 요지가 있는 원머리산의 동남 사면이 되며, 그 남쪽으로는 순자강이 있고 석촌 고분군에서 500m내외 지점에 해당된다.
10. 회산 요지: 전라북도 남원시 보절면 괴양리 회산마을 해발 380m 내외인 계룡산의 북쪽 줄기에 자리하고 있으며 북쪽에 있는 낮은 야산의 동쪽 사면에 자리하고 있다.
11. 왕정동 도요지: 전라북도 남원시 왕정동 만복사지의 북쪽에 있는 해발 190m 내외의 기린봉의 남쪽 사면에 자리하고 있는 조선 백자 요지이다. 기린봉의 남쪽 사면의 중간에 계곡이 있는데, 이 계곡을 중심으로 동쪽에 있는 사면의 거의 전면에 요지가 자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