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0003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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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光山金氏 |
영어의미역 | Gwangsan Gim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상월면|부적면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경수 |
세거지 |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상월면|부적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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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성촌 |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고정리 |
입향시기/연도 | 조선 전기(1404년) |
성씨시조 | 김흥광 |
입향시조 | 김약채 |
[정의]
김흥광을 시조로 하고 김약채를 입향조로 하는 충청남도 논산시 세거 성씨.
[연원]
광산김씨 시조 김흥광(金興光)은 신라 말기 신무왕의 셋째 왕자로 태어났다. 고려가 삼국을 통일하자 신라의 비운을 예견한 김흥광은 무주(武州, 현 광주광역시 평장동)의 서일동에 피신 은거함으로써 시조가 되었다. 광산김씨 가문은 조선시대에 총 260여 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였고, 여기에서 정승·대제학·청백리·왕비를 합하여 17명이 나왔다. 특히 대제학 7명은 광산김씨를 빛나게 한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자손이다.
광산김씨는 고려 초기 삼중대광에 오른 3세손 김길(金佶)로부터 8대에 걸쳐 평장사(平章事)를 배출하여 명문 가문의 기반을 이루었으며, 15세손으로 대광(大匡)에 오른 김정(金鼎)의 아들인 김약채(金若采)·김약항(金若恒)·김약시(金若時) 3형제 대에서 더욱 번창하기 시작하였다.
[입향경위]
고려시대 개경 주변에서 거주하다가 1371년(공민왕 20)에 문과에 급제했던 김약채가 광산김씨의 논산 지역 입향조라고 전해진다. 김약채는 1404년(태종 4) 충청도 관찰출척사를 지내면서 논산의 연산 지역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정착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김약채의 묘가 양주 풍양현에 있었고[失傳], 김약채의 아들 김문(金問)의 묘는 장단에 있었던 것을 보면, 관직 생활 때문에 개성 근방에 근거지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김문의 부인인 양천허씨가 청상과부로 수절하면서 자손을 잘 키웠고, 묘소가 연산면 고정리에 있으며, 후손의 묘도 연산 일대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진정한 입향조는 김문의 부인 양천허씨라고 말할 수 있다. 본격적인 세거는 김문의 손자 김국광(金國光) 대부터이다. 김국광과 김겸광(金謙光)은 각기 문과에 급제하여 좌의정과 우참찬에 올라 가문의 지위를 높였다. 이들 이후 광산김씨는 전국적인 문벌의 대열에 올라섰다. 1930년경에 논산시 일원, 서산시 팔봉면 등지에 집성촌을 이루다가 1980년경에 논산시 연산면 고정리에 집성촌을 이루었다.
[현황]
광산김씨는 연산면 일대에 많이 살고 있으나 정확한 세대수는 파악하기 어렵다. 1930년대에는 115호가 살았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주민 제보에 따르면 2008년 기준 양촌면 석서리와 반곡리에 약 30여 호가 살고 있다.
[관련유적]
김국광의 묘소가 연산면과 인접한 충청남도 계룡시 두마면 왕대리에, 김겸광 묘소는 논산시 연산면 고정리에 있다. 두마면 왕대리 부근은 고려시대 광소부곡의 터로서, 광산김씨의 경제적 기반으로 알맞은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