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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당자리 등토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002112
한자 明堂-山
영어의미역 Deungtosan Propitious Site for Grave
이칭/별칭 「명당자리 등토산 설화」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충청남도 논산시 연무읍 소룡리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박종익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전설|명당획득담
주요 등장인물 유생|노인|자손
관련지명 등토산|역적날
모티프 유형 명당의 획득|명당의 이전

[정의]

충청남도 논산시 연무읍 소룡리에서 명당자리 등토산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채록/수집상황]

1981년에 논산문화원에서 출간한 『놀뫼의 전설』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

조선시대 경상도에 한 유생이 살았다. 유생은 자손을 번창시켜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하는 명문가를 만드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래서 유생은 전국 방방곡곡에 있다는 명당자리를 찾아다녔다. 그러다가 현재의 충청남도 논산시 연무읍에 있는 등토산을 발견하였다.

유생이 보기에도 등토산은 명당자리였다. 유생은 곧 선조의 묘를 파서 유골을 등에 업고 다시 등토산을 찾았다. 그리고 등토산 꼭대기에 선조의 유골을 이장하였다. 그 후 유생은 이곳에 눌러 살며 아내를 맞이하여 자식을 낳았다. 사십 고비에 아들딸을 낳기 시작하여, 팔십이 되었을 때에는 자식, 손자들이 무려 사십 명이 넘게 되었다.

선조의 묘를 잘 써서인지 첫째 아들은 과거에 급제하였고, 둘째 아들은 진사에 합격하여 순탄하게 벼슬길에 올랐다. 셋째, 넷째에 이어서 손자들까지 관운이 따라 순탄하게 출세하였다. 벼슬길에 오른 아들들은 유생에게 한양으로 이사하길 권하였다. 자식들은 부모를 편히 모시기 위해 이사를 가자고 한 것이었다. 하지만 유생은 선조의 무덤이 있는 이곳을 떠나지 않았다.

어느 날 유생이 잠을 자고 있는데 꿈속에 한 노인이 나타났다. “너의 가정이 이렇게 번창한 것은 모두 선조의 덕이니라. 지금까지는 그대의 아버지 덕분에 자손이 융성하였으나 그 맥도 한이 있느니라. 너에게 베푼 선조의 도움도 조선 팔도의 감사 여덟 명으로 끝날 것이다.” 노인은 이렇게 말하고 사라졌다.

꿈에서 깨어난 유생은 ‘참 이상한 꿈이로구나.’라고 생각하였다. ‘여덟 명의 감사가 나면 끝’이라는 말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벼슬살이를 하는 자손들을 손으로 꼽아보았다. “아뿔싸, 그러고 보니 우리 집 아이들이 조선 팔도 감사 자리를 다 하고 있구나.”

유생은 그 길로 삽자루를 들고 등토산에 올랐다. 그리고 조상의 묘를 파서 유골을 정리하였다. 유골을 들고 산을 내려오던 유생은 등토산 중간쯤에 유골을 다시 묻었다. 이렇게 묘를 다 쓰고 새벽녘에 돌아와 잠이 들었다. 그러자 꿈속에 노인이 다시 나타났다. “등토산 꼭대기 묏자리는 여덟이 출세하면 다음은 역적이 하나씩 나오는 자리일세. 그러나 이장을 했으니 걱정할 것 없네.” 노인은 이렇게 말하고 사라졌다. 그 후로 유생은 이 고장에서 구십이 넘도록 살다가 죽었다고 한다.

지금도 충청남도 논산시 연무읍 양지리소룡리를 가로지르는 등토산은 명당자리가 많기로 유명하다. 하지만 등토산의 산등성이는 역적이 난다 하여 역적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모티프 분석]

「명당자리 등토산」의 주요 모티프는 ‘명당의 획득’과 ‘명당의 이전’이다. 자손의 번창을 위해 명당을 획득하는 명당획득담으로, 명당획득과 그 기능에 관한 내용을 소재로 취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명당에는 금기나 제한적 요소가 전제되는데, 「명당자리 등토산」에서의 제한은 여덟 명의 감사가 난 이후부터 역적이 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역적이 날 즈음 신비하게도 한 노인이 등장하여 이를 알려 줌으로써 잠재되어 있던 갈등이 해소되는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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