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7003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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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三陟靑年同盟 |
영어공식명칭 | Samcheok Youth League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강원도 삼척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이청희 |
[정의]
일제 강점기 강원도 삼척 지역에 있었던 청년 운동 단체.
[설립 목적]
삼척청년동맹(三陟靑年同盟)은 1927년 10월 노동조합과 농민조합의 결성을 위한 청년 운동 단체로 조직되었다.
[변천]
1931년 5월 삼척청년동맹을 해소하였다고는 하지만 같은 해 11월 30일 발생한 근덕면 사무소 습격 사건을 삼척청년동맹이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강원도 삼척군에서 조직된 청년 운동 단체 삼척청년동맹은 1927년 10월 당시 『조선일보』 삼척지국 기자로 있던 정건화(鄭健和)를 비롯하여 심부윤(沈富潤), 이상인(李尙寅), 박래빈(朴來賓), 전엽(全燁), 서두인(徐斗仁), 오원모(吳元模) 등이 주동이 되어 조직하였다. 삼척청년동맹은 집행위원장에 정건화를 뽑고 신간회 삼척지회, 농민조합, 노동조합 등의 조직에 많은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삼척청년동맹은 조직과 활동 자체가 당시의 실정 법인 치안유지법에 위배되어 비밀리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관련 자료가 매우 부족한 실정이다.
이런 이유로 당시 신문에 실린 기사들을 뽑아서 대략이나마 그 내용을 살펴보기로 한다.
1927년 12월 8일자 『매일신보』에 실린 강릉 신간지회 창립 기사의 내용 가운데 내빈으로 양양 신간지회 총무부장 함하룡(咸河龍)과 삼척청년동맹 집행위원 심부윤의 축사가 있었다는 기사가 있는 것으로 볼 때 삼척청년동맹은 이미 조직되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참고로 신간회 삼척지회의 성립은 1928년 3월에 당시 『조선일보』 삼척지국 기자로 있으면서 그보다 앞서 삼척청년동맹 조직에서 주도 역할을 한 정건화, 심부윤이 주동이 되어 조직되었다고 하니 그 맥락이 연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31년 12월 6일자 『동아일보』에는 같은 해 11월 30일 근덕면~노곡 사이의 도로 개수 공사 부역에 반대해서 일어난 삼척군근덕면 사무소를 습격한 사건으로 말미암아 강원도 경찰부 고등과에서는 오와키[大脇] 과장 차석이 12월 3일 근덕면 현장에 출장하여 현지 청년동맹 간부 7명을 검거하였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뒤이어 1931년 12월 12일자 『매일신보』에는 “삼척의 근덕~노곡의 도로 개설 공사에 반대한 사건에 대한 회의가 도 경찰부 고등계 오와키[大脇] 경부와 삼척군수 임시재(任是宰)의 임석하에 있었다. 청년 동맹이 중심이 되어 면내의 무식 계급을 선동하여 일으켰으며 청년 동맹원 20여 인이 삼척경찰서에 검속되었다.”고 보도하고 있다.
1931년 12월 21자 『매일신보』에는 「삼척군 근덕면 소요사건」이라는 제목 아래 “12월 15일 청년 동맹원 12인을 강릉 검사국으로 송치하였고 남은 10여 인도 금명간 송치하리라 한다.”고 되어 있어 삼척청년동맹의 활동에 대하여 유추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해 주는 듯하다. 그러나 1935년 2월 17자 『조선중앙일보』의 기사를 살펴보면 “1931년 5월 삼척 청년 동맹을 해소한 이 동맹의 간부들은 단일 조선 공산당을 조직하기 위한 준비 공작으로 삼척 일대에 혁명적 노동조합과 혁명적 농민 조합을 지하에 확보하고 1931년(11월) 농번기의 도로 부역에 반대하여 1000여 명의 면민을 동원하여 [근덕]면 사무소를 습격하고, 운동 자금의 확보를 위하여 이 지역 금광을 습격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1934년 100여 명이 피검되었다.”라는 기사가 실려 있다.
그러나 1939년 3월 9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삼척 청년 동맹 삼척군지부 북삼지부 위원회를 내일 10일 동 회관 내에서 개최함.”이라는 내용의 기사가 실려 있어 그 실상을 파악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이 기사를 마지막으로 삼척청년동맹을 거명한 기사는 더 이상 확인할 수 없었다.
[의의와 평가]
삼척청년동맹은 일제강점기 때 삼척 지역의 노동조합과 농민조합 결성에 앞장서는 등 노농 운동을 이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