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7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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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黃甲秀 |
영어공식명칭 | Hwang Gapsu |
이칭/별칭 | 황인덕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정을경 |
[정의]
일제강점기 세종 지역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황갑수(黃甲秀)[1921~2009]는 옛 충청남도 연기군 전동면 출신으로 광복군 분대장을 맡아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활동 사항]
황갑수는 1945년 2월에 광복군 제1지대에 입대하여 광복군 제1지대 제3분대 제3분대장으로 중국의 후난성[湖南省]에서 활발히 활동하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현지 중국군 지휘관은 정확한 정보와 효율적인 인솔로 여러 적의 부대를 섬멸하면서 많은 포로를 포획하였다. 중국군의 일화를 알게 된 이병곤(李炳坤)은 설악 사령장관에게 애국 청년들을 후방 지역에 집결시켜 교육을 실시하게 할 것과 제9전구를 단위로 한 광복군 편성에 협조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병곤의 요구를 설악 사령장관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1944년 말을 전후하여 각 전선에는 100여 명의 애국 청년들이 일본군에서 탈출하여 합류하였다. 탈출한 100여 명의 청년과 앞으로 탈출할 장병 전원을 장관 사령부 소재지인 계동(桂東)과 전방 지휘소 소재지인 장시성[江西省]의 이춘[宜春]에 각각 집결시키도록 지시하였다. 또한 광복군 편성에 따르는 절차에 대하여 군사위원회에 주선하여 줄 것을 승낙하였다.
설악 사령장관 지시가 각 부대에 시달된 직후 1945년 1월을 전후하여 제2진으로 여성(汝城) 지구 유격대에서 활약하던 학도병 출신인 황갑수를 비롯하여 제3진까지 새로이 40여 명의 한국 청년이 집결되었다. 청년들은 광복군으로 편성될 때까지 비호대(飛虎隊)라는 부대명으로 대장 이봉훈과 부대장 진병길을 주축(主軸)으로 하여 동지 결속 및 우군에 대한 작전 지원 활동을 계속하였다. 현지 중국 각 부대에서 활동하던 인원의 후방 집결은 대체적으로 완료되었다. 그리고 각종 지침에 따라 1945년 2월 15일을 기하여 ‘제3구대’가 창설되었다. 제3구대에서 황갑수는 제3분대 2대 분대장으로 명령받았다.
광복군에 편성된 황갑수는 3개월이라는 기간 동안 정규 교육 훈련을 받았다. 그런데 교육 훈련 도중에 각 전선으로부터 광복군 공작 요원을 파견하여 달라는 요청이 쇄도하여 부득이하게 일면 교육 일면 공작으로의 방침으로 변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구대장 이병곤은 계동에서, 먼저 편성된 제1분대 대원 중에서 전재덕(全在德)·강익진(康翊鎭)·황갑수를 각각 조장(組長)으로 한 3개 공작조를 편성하는 것으로 조직을 개편하여 공작에 임하게 하였다.
한편 구대 본부에서는 교육반을 편성하여 후방 잔류 대원 및 새로 입대하는 인원에 대한 자체 교육을 실시하면서 다음 단계의 목표로 결정적인 시기에 무장 부대로 강화하여 참전할 계획을 세웠다. 미 군사 지원단에 근무하면서 단장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있던 정윤성을 통하여 미군의 신예 무기 획득을 위한 교섭을 진행하여 거의 성공 단계에 이르게 되었을 무렵에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다. 제9전구 지역에서 황갑수가 속하여 있던 광복군의 활동은 우군의 제일선 싸움터에서 170여 명의 대원이 집결하여 전방 또는 후방 공작에 참여함으로써 우군 작전에 많은 공헌을 세웠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황갑수의 공적을 기리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