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1001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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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忠臣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기도 성남시 |
집필자 | 문수진 |
[정의]
왕과 나라에 충성을 다하는 신하.
[개설]
성남시 지역은 조선시대 한성에 도읍한 이후에 많은 사람이 주거하게 되었다. 특히 수도에서 낙향하거나, 선조의 묘지를 쓰고 집성촌을 형성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은 유교를 숭상하는 국가로서 충효사상을 강조하였으므로, 역사적으로 충신, 효자를 많이 배출하였고, 성남 출신 인물로서 충신으로 이름을 날린 사람이 많다. 고려 이전의 인물이 기록으로 전하는 것은 발견되지 않았다.
조선 이후에 많은 충신들이 나타난다. 그런데 성남에서 태어나 성장하고 죽은 사람은 극히 드물고 가장 많이 나타나는 것은 죽어서 성남에 묘지를 쓴 경우이다. 이들도 일단 성남의 인물이라 여겨 함께 기술한다.
[각성(覺性, 1575~1660)]
승려로서 호는 벽암(碧岩)이다. 임진왜란 때 해전에도 참가하고 광해군의 명으로 봉은사에 머물면서 판선교도총섭(判禪敎都摠攝)의 직을 받고 많은 사대부와 교류하였다. 1624년(인조 2) 남한산성을 쌓을 때 팔도도총섭으로 임명되어 승군을 이끌고 3년만에 성을 완성시켰다. 이에 조정에서는 보은천교원조국일도대선사(報恩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의 직함과 의발을 하사하여 그 공을 치하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왕이 남한산성으로 피하자 전국 사찰에 격문을 보내 3천명의 의승군을 모집하였다. 이를 항마군이라 이름 짓고 남한산성으로 향하던 중 전쟁이 끝나 항마군을 해산하고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권징(權徵, 1538~1598)]
안동권씨로서 권근(權近)의 후손이다. 명종 17년(1562)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검열(檢閱), 주서(注書) 등을 역임하고 병조좌랑으로 춘추관 기사관을 겸직하여 『명종실록』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뒤 동부승지, 도승지, 형조참의를 역임하고 『정철(鄭澈)』의 당으로 평안도관찰사로 좌천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기도 지방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경기도관찰사에 특별히 임명되어 침략을 막으려고 최선을 다하였으나 패배하고 삭녕에 들어가 흩어진 군사를 모아 군량미 조달에 진력하였다.
권율(權慄) 등과 함께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의 의병을 규합하여 왜병과 싸웠다. 1593년 서울 탈환작전에 참가하였으며, 명나라 이여송(李如松)이 추진하는 화의에 반대하고 끝까지 왜병과 싸울 것을 주장하였다. 그 뒤 공조판서가 되어 전년 9월에 왜병에 의해 파헤쳐진 선릉(宣陵)과 정릉(靖陵)의 보수를 주관하였다. 묘소가 성남시 수정구 금토동에 있다.
[맹석흠(孟碩欽, 1429~?)]
신창맹씨로 좌의정을 지낸 맹사성(孟思誠)의 증손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충청도병마절도사에 제수되고, 1467년(세조 13) 이시애의 난 때 구성군 이준(李浚)[1441~1479]과 출정하여 이시애 군을 대파하고 그를 참수하였다. 성남시 분당구 분당동 샛당모루는 신창맹씨의 사패지로, 신창군 맹석흠의 자손이 세거한다. 샛당모루 남쪽에 있는 맹산에는 신창군 맹석흠을 비롯한 맹씨 선조의 묘가 있다.
[송언신(宋言愼, 1542~1612)]
여산송씨로 노수신(盧守愼)과 이황(李滉)의 문하로서 명종 때 승려 보우(普雨)를 논죄할 것을 주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선조 때 대사간, 병조판서, 이조판서를 역임하고 선조 승하 후 간신들이 정권을 장악하자 광주 반곡에 은둔하였다. 묘소는 성남시 중원구 하대원동에 있다.
[양연(梁淵, 1485~1542)]
남원양씨로서 중종 32년(1537)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김안로(金安老) 등의 붕당이 옳지 않은 계략을 꾸미자 이를 탄핵하여 처형케 하였다. 묘소는 성남시 중원구 상대원동에 있다.
[유석보(柳錫輔, 1550~?)]
본관은 진주이다. 1620년(광해군 12) 이귀(李貴), 김자점(金自點), 최명길(崔鳴吉) 등이 한 무리가 되어 김자점과 최명길의 모의를 중국 한(漢)나라 동탁(董卓)의 일에 비유하였다가 김자점의 모해로 죽임을 당하였다. 묘는 성남시 분당구 분당동에 있다.
[이경함(李慶涵, 1553~1627)]
한산이씨로 1594년(선조 27) 사헌부장령으로 있으면서 정철(鄭澈)의 삭직 논의에 대한 부당성을 과감히 상소하였다. 묘는 성남시 분당구 수내동에 있다.
[이경헌(李景憲 1585~1651)]
덕수이씨로 병자호란 때 인조를 남한산성으로 호종하였고, 환도하여 가의대부에 올라 병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를 거쳐 개성유수가 되었다. 1639년(인조 17) 사은부사로 청나라 심양에 가서 인조의 병이 심하므로 볼모로 있는 세자를 대신하여 본국의 원손을 볼모로 하고 세자를 귀국케 하였다. 이것이 왕의 뜻을 어겼다 하여 1640년 남양에 유배되었으나 세자가 귀국한 후 풀려나와 호조참판, 공조참판, 경기도관찰사, 강화유수 등을 역임하였다. 묘는 성남시 수정구 상적동에 있다.
[이극균(李克均, 1437~1504)]
광주이씨로, 1467년(세조 13) 만포첨사로 남이(南怡) 장군과 함께 이만주를 토벌하는 데 선봉장이 되었다. 1491년(성종 22) 이조판서로 서북면도원수가 되어 야인을 토벌하는 데 공을 세워 광남군(廣南君)에 봉하여졌다. 누차 연산군의 잘못을 바로잡으려고 한 까닭에 연산군의 미움을 받아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 인동에 유배된 후 사사되었고, 죽은 후 부관참시되었다. 묘소는 성남시 분당구 야탑동에 있다.
[이극배(李克培, 1422~1495)]
광주이씨로 이인손(李仁孫)의 아들이다. 수양대군의 총애를 받아 공신이 되고 1459년(세조 5) 신숙주(申叔舟)가 야인을 토벌할 때 함께 출전한 후 돌아와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병조판서, 우의정, 영의정을 역임하고 광릉부원군에 봉하여졌다.
[이상안(李尙安, 1575~1627)]
광주이씨로, 1623년(인조 1) 절충장군이 되어 창주첨사(昌州僉使) 남이흥(南以興)의 별장으로 안주전투에서 싸우다 전사하였다. 묘는 성남시 중원구 하대원동에 있다.
[이성(李晟, 1565~1626)]
연안이씨로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인조를 공주로 호종한 공으로 광주부윤에 특별히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묘는 성남시 분당구 하산운동에 있다.
[이자(李澬, 1579~1667)]
전주이씨로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1629년(인조 7) 인목대비가 서궁(西宮)에 유폐되었을 때 위험을 무릅쓰고 문후한 일에 의해 소무원종공신(昭武原從功臣) 1등에 책훈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항거하자 아들 이원철(李元哲)과 함께 성에 들어가 호종, 재차 원종공신에 녹선되었다.
[이형윤(李炯胤, 1593~1645)]
전주이씨로 이괄(李适)의 난 때 인조를 공주로 호종하고, 1627년 정묘호란에는 강화도에 어가를 호종하였다. 묘는 성남시 분당구 백현동에 있다.
[정대년(鄭大年, 1507~1578)]
동래정씨로, 1537년(중종 32) 사헌부 지평으로 있으면서 윤원형(尹元衡), 윤원로(尹元老), 김안로(金安老)의 죄를 다스렸다. 일찍이 성남시 수정구 신흥동에 은거하여 묘소도 있었으나 이장하였다.
[정립(鄭岦, 1574~1629)]
영일정씨로 1624년(인조 2)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도쿠가와(德川家康)의 습위식에 참석한 후 임진왜란에 포로로 잡혀갔던 동포 146명을 데리고 돌아왔으며 난으로 소실된 역대 실록의 재간사업에 참여하였다. 묘는 성남시 수정구 복정동에 있었으나 1983년 도굴당하여 원형을 잃었다.
[정세규(鄭世䂓, 1583~1661)]
동래정씨로, 충청도관찰사로 있을 때 병자호란으로 왕은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였으나 산성이 청군에 포위되어 각지의 병사, 관찰사가 모두 제때에 나아가지 않았다. 이에 근왕명령을 받고 즉시로 도내의 각 고을에 격문을 띄워 수령들로 하여금 군사를 모아 공주로 집결케하여 천여명의 군사를 남한산성으로 진군하였다. 대부분이 전사하여 자신도 자결하려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으나 부상만 당하고 수원으로 후퇴하였다.
[정태제(鄭泰齊, 1621~?)]
동래정씨로, 1645년(인조 23) 정조사로 청나라에 가서 봉림대군의 귀환을 허락받고 돌아왔다. 묘가 광주 음촌에 있었으나 이장되었다.
[한백봉(韓百鳳, 1881~1950)]
청주한씨로, 1919년 고종의 장례식에 참석차 상경하였다가 3.1운동에 참가하였다. 향리에서도 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심하고 한순회(韓順會) 등 돌마면 내 유지들과 협의하였다. 3월 27일 분당리 장날에 봉기하려다 피체되어 징역 1년을 언도받고 복역하였다. 1927년에는 한순회를 중심으로 이대헌(李大憲), 유인목(兪仁穆), 한백호(韓百鎬) 등과 신간회 광주지회를 조직하고, 1930년까지 지회 임원으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90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이 수여되었다.
[한사문(韓士文, 1446~1507)]
청주한씨로, 좌찬성 한계희(韓繼禧)의 장남이다. 중종반정에 공을 세워 정국공신(靖國功臣) 4등에 책훈되고 서천군(西川君)에 피봉되었다.
[한술(韓述, 1541~1616)]
청주한씨로, 임진왜란 때 선조를 호종, 호성원종공신에 책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