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1016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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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景奭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성남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연복 |
[정의]
조선 후기 성남 지역 출신의 종친·문신.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상보(尙輔), 호는 백헌(白軒)이다. 정종(定宗)의 열 번째 왕자인 덕천군(德泉君)의 6대손이며, 이수광의 손자이고, 동지중추부사 이유간(李惟侃)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개성고씨로 대호군 고한량의 딸이고, 부인은 류색의 딸이다.
[활동사항]
김장생(金長生)에게 수학하였다. 1613년(광해군 5) 진사가 되고 1617년 증광별시에 급제하였으나, 이듬해 인목 대비(仁穆大妃)의 폐비상소에 가담하지 않아 삭적(削籍)되었다. 1623년의 인조반정 뒤의 알성문과(謁聖文科)에서 을과로 급제, 승문원부정자를 시작으로 검열·봉교로 승진하였고 춘추관사관(春秋館史官)도 겸임하였다. 이괄(李适)의 난으로 인조가 공주로 몽진을 하게 되자 승문원주서로 왕을 호종하였다. 이어서 봉교, 전적, 예조좌랑, 정언, 교리 등을 거치고 1626년(인조 4)에는 호당(湖堂)에 들어갔다. 이조좌랑, 이조정랑에 올라 인사 행정의 실무를 맡게 되었다.
이듬해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체찰사 장만(張晩)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강원도 군사 모집과 군량미 조달에 힘썼다. 정묘호란 후 다시 이조정랑 등을 거쳐 승지에 올라 인조를 측근에서 보필하였다. 1629년 자청하여 양주목사로 나가 목민관으로서의 실적을 올렸다. 승지를 거쳐 1632년에는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르고 대사간에 제수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대사헌·부제학에 연배되어 인조를 호종하여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청나라에 패한 나온 뒤에 도승지에 발탁되고, 예문관제학을 겸임하면서 「삼전도비문(三田渡碑文)」을 지어 올렸다. 이듬해 홍문관·예문관 양관의 대제학이 되었고, 얼마 뒤 이조참판을 거쳐 이조판서에 발탁되어 조정인사를 주관하게 되었다. 1641년에는 청나라에 볼모로 가 있던 소현 세자(昭顯世子)의 이사(貳師)가 되어 심양으로 가 현지에서 어려운 대청외교(對淸外交)를 풀어나갔다. 그러나 이듬해 명나라 선박이 선천에 들어온 일이 청나라에 알려지자, 그 사건의 전말을 사문(査問)하라는 청나라의 명을 받고 서북지역으로 돌아왔으나 조선의 관련 사실을 두둔하느라 청 황제의 노여움을 사 영원히 등용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귀국, 3년 동안 벼슬에서 물러났다.
1644년에 복직,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 좌의정을 역임한 뒤 이듬해 마침내 영의정에 올랐다. 그러나 1646년에 효종의 북벌계획이 이언표(李彦標) 등의 밀고로 청나라에 알려져 또 한 차례의 사문사건(査問事件)이 일어나게 되었다. 청나라의 사문사는 남별궁에서 영의정 이경석과 정승, 판서 및 양사의 중신 등을 모두 세워놓고 북벌계획의 전말을 사문, 치죄하고자 하였다. 그는 모든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돌려 국왕과 조정의 위급을 면하게 하였지만 청나라 사신들로부터 대국을 기만한 죄로 몰려 극형에 처하게 되었다. 국왕이 구명을 간청하여 겨우 목숨만을 부지하였고, 청나라 황제의 명에 의하여 다시 영불조용의 명을 받아 벼슬에서 물러나 1년 남짓 경기도 광주(廣州)의 판교와 석문(石門)에서 은거하였다.
1653년(효종 4)에 풀려나 영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며, 1659년에는 영돈녕부사가 된 뒤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고, 1668년(현종 9) 신하의 영예인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
[학문과 사상]
이념과 정책은 숙종대의 소론으로 연결된다. 문장과 글씨에 특히 뛰어났는데 시문은 경학(經學)에 기초한 것이 주류를 이루었고, 문장은 “기력(氣力)이 웅혼하고 광화현란(光華絢爛)하며, 시도 활동양염(活動穰艶)하다”는 칭송을 받았다. 그의 정치적 생애는 인조·효종·현종의 3대 50여 년에 걸쳐 나라 안팎으로 얽힌 난국을 적절하게 풀어나간 명재상이었다. 그러나 생애 말년에는 붕당정치 속으로 휘말려 들어가게 되어서 사후에는 심한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는 『백헌집(白軒集)』 등 유집 50여 권이 간행되었고, 조경(趙絅), 조익(趙翼) 등과 함께 『장릉지장(長陵誌狀)』을 편찬하였다. 글로는 「삼전도비문」이 있으며, 인조대왕이 승하했을 때에는 그 행장을 지어 바치기도 하였고, 한강의 뚝섬 앞쪽에 있다가 1970년대 강남을 개발하면서 그곳의 모래로 아파트를 짓는 바람에 지금은 사라진 섬 저자도(楮子島)의 풍광을 운치 있게 묘사한 글 「풍월정기」도 있다. 그리고 글씨로는 「좌상이정구비문(左相李廷龜碑文)」, 「이판이명한비(吏判李明漢碑)」, 「지돈녕정광성비문(知敦寧鄭廣成碑文)」 등이 있다.
[묘소]
이경석 묘는 청계산의 서남쪽 구릉인 성남시 분당구 석운동 산16-18, 속칭 대감능골에 있다. 1985년 경기도 기념물 제84호로 지정되었으며, 전주이씨 백헌공파에서 관리하고 있다.
[상훈과 추모]
남원의 방사서원에 제향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