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1016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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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德重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성남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정성희 |
[정의]
조선 후기 성남 지역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자이(子彛), 호는 결재(潔齋)이다. 이조참판 이택(李澤)의 손자이며, 증 이조참판 이병겸(李秉謙)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윤상명(尹商明)의 딸 이고, 부인은 홍현보(洪鉉輔)의 딸이다.
[활동사항]
벼슬길로 나가기 전에 1721년(경종 1) 이천기(李天紀) 등과 함께 혈당(血黨)을 조직하여 재물을 물 쓰듯 한다는 혐의로 탄핵을 받기도 했으나 무사하였다. 1727년(영조 3)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730년(영조 6) 경술정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이 되었다. 1734년 조명경(曺命敬)의 천거 과정에서 하자가 있었던 사건에 연루되어 검열직에서 물러났다. 관직이 삭탈되어 있던 가운데 1735년 소를 올려 영조가 사초(史草)를 열람하고 불사르게 한 것에 대하여 그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고 추록(追錄)할 것을 청하는 등의 강직함을 보였다. 그 뒤 여러 차례 사간원정언과 사헌부지평을 역임하였다.
1739년 밀양군(密陽君) 이완(李梡)이 진위사 겸사은사(陳慰使兼謝恩使)로 청나라에 갈 때 서장관(書狀官)으로 수행하였다. 1739년에 정언 홍계희(洪啓禧)의 상소가 못마땅하다 하여 해남에 유배시키려 하자 그 부당함을 주장하다가 노여움을 사서 진도에 유배될 뻔 했으나 승지 구택규(具宅奎)의 도움으로 감형되었고, 1740년 응교로 복직되었다. 비교적 순탄한 길을 걸어 정3품 당상관인 통정대부 홍문관 부제학까지 올랐다.
[묘소]
이덕중의 묘는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수내동 산1-2 한산이씨 묘역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