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3008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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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呂榮元 |
이칭/별칭 | 양장(襄壯)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양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명환 |
출생 시기/일시 | 1595년 - 여영원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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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627년 - 여영원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796년 - 여영원 정려됨, 병조 판서에 추증됨, 시호를 받음 |
정려문 | 경기도 양주시 봉양동 881 |
성격 | 무신 |
성별 | 남 |
본관 | 함양 |
대표 관직 | 벽동진 병마절제사 |
[정의]
경기도 양주시에 정려문이 있는 조선 후기의 무신.
[활동사항]
여영원(呂榮元)[1595~1627]은 인조[재위 1623~1649] 때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첨정(訓鍊院僉正)이 되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후금(後金)이 쳐들어오자 벽동진 병마절도사에 임명되어 압록강 변의 요충지인 벽동(碧潼)의 수비를 맡았다. 후금의 병사들과 싸움이 벌어졌을 때 변변한 군사도 없이 수백 명의 관졸을 이끌고 나가 300여 명의 적을 베었다. 결국 화살이 떨어지고 활시위가 끊어지자 백병전을 벌이다가 “적을 다 베지 못하고 죽는 것이 한스럽다.”는 말을 남기고 자결하였다.
[상훈과 추모]
1796년(정조 20)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양장(襄壯) 시호와 함께 충신 정려문이 내려졌다. 경기도 양주시 봉양동 881번지에 세워진 정려문은 6·25 전쟁 때 불타 버려 1992년에 후손들이 복원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