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5007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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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白源發 |
영어공식명칭 | Baek Wonbal |
이칭/별칭 | 자장(子長),자민(子民),양몽재(養蒙齋)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북도 영덕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소희 |
출생 시기/일시 | 1597년 - 백원발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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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671년 - 백원발 사망 |
출생지 |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경상도 영해도호부] |
묘소|단소 |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 대곡리 동로동 |
성격 | 학자 |
성별 | 남 |
본관 | 대흥(大興) |
[정의]
조선 후기 영덕 출신의 학자.
[개설]
백원발(白源發)[1597~1671]은 유고로 「양몽재유고(養蒙齋逸稿)」를 남겼다.
[가계]
백원발의 본관은 대흥(大興), 자는 자장(子長)·자민(子民), 호는 양몽재(養蒙齋)이다. 고조부는 백계근(白繼根)이고 증조부는 백당(白瑭)인데, 모두 참봉을 지냈다. 조부는 서학교수를 역임한 백인국(白仁國)[1530~1613]이다. 아버지 백민수(白民秀)는 임진왜란의 전공(戰功)으로 직장(直長)을 제수(除授)받았다. 어머니는 금위(禁衛)를 지낸 황응하(黃應河)의 딸 평해황씨(平海黃氏)이며 , 부인은 남경훈(南慶薰)[1572~1612]의 딸 영양남씨(英陽南氏)이다.
[활동 사항]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두문불출하며, 고향에 양몽재를 짓고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매진하였다.
[학문과 저술]
백원발은 남경훈에게 학문을 배웠다. 남경훈은 일찍이 백원발의 기지를 보고 백원발을 사위로 삼았다. 약관의 나이에 잠와(潛窩) 이명준(李命俊)[1572~1630]에게도 수학하였으며, 학문과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문집으로 「양몽재유고」가 있는데, 일족의 유고를 엮은 『원고세고(元皐世稿)』에 수록되어 있다.
[묘소]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 대곡리 동로동(東魯洞)에 묘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