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3008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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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風水-傳說 |
영어의미역 | Legend about the Theory of Divination Based on Topography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남도 여수시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 |
집필자 | 김준옥 |
[정의]
전라남도 여수시에서 전해 내려오는 지형과 지명에 대한 풍수 이야기.
[개설]
남북국시대 도선(道詵)[827~898]은 지세의 변화와 풍수의 조화가 인간의 생사까지 결정한다는 풍수지리설을 확립하였다. 그 후 풍수지리설은 우리 민족 생활 저변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여 왔다. 특히, 현재까지 지명과 관련하여 구비 전승되는 많은 이야기가 풍수지리설과 관련이 있다. 우리나라의 마을 이름은 일정한 틀에 의하여 생겨나기보다는 어떤 연유에 근거하여 생겨난 경우가 많다. 여수 지역에도 풍수지리설에 연유하여 생겨난 지명이 많이 전해지고 있다.
[내용]
풍수지리설은 일반적으로 양택과 음택으로 크게 둘로 나누는데, 양택은 도읍지나 마을 터, 집터 등을 잡을 때, 음택은 묏자리를 잡을 때 적용된다. 양택 풍수와 관련한 이야기는 주로 마을의 지형 설명과 그 마을 주민이나 씨족의 흥망성쇠에 관한 내용이다. 양택이든 음택이든, 마을에 속한 산, 들, 골짜기, 재, 내 등의 지역이 동물과 식물의 형상을 빌려 설명되는 사례도 많이 있다.
여수 지역의 양택 풍수 중 고읍 터로서는 여수 장군도를 중심으로 한 지형과 과거 돌산현 터를 들 수 있다. 여수 장군도는 옛 전라좌수영 터를 포함하여 여수의 옛 시가지로 장군도를 여의주처럼 사이에 두고 세 마리의 용이 다투는 형국으로 비유하고 있다. 돌산읍 군내리는 돌산의 고읍 터를 말하는데, 돌산의 고읍 터 뒤는 음택 자리로도 좋은 곳이라는 풍수설이 있다. 연회가 끝나고 개선장군은 속세를 떠나고자 스님이 되어 바랑을 걸머지고 돌산읍 신복리 예교 뒷산을 넘어갔다고 하여, 지금도 신복리 예교 골짜기를 중바랑계라고 하며, 신복리 예교 골짜기가 명당이라 하여 예부터 묘를 많이 쓰고 있다.
또한, 돌산읍 군내리 아뒤산 계곡을 옥녀탄금혈(玉女彈琴穴)이라 하는데, 군내리 아뒤산 계곡은 가뭄이 들어도 물이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여기에서 흐르는 물이 마을 중앙을 지나 바다로 흘러간다. 옛날 한 지관이 이 마을에서 여자가 태어나면 미녀가 많지만, 행실이 방정치 못할 것이라 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마을 방답진성 축성 시에 남문을 짓고 문안에 유수지(遊水池)를 만들어 바다로 바로 흐르던 물을 고이게 하여 동문 쪽으로 흐르게 하였는데, 이것을 서류동류수문통(西流東流水門通)이라 하였다 한다.
이밖에 마을 자리에 관한 이야기로 율촌면 봉두마을과 중흥동 용성마을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율촌면 봉두마을은 봉황새가 알을 품은 좋은 집터라 한다. 위효정이라는 사람이 우연히 현재 장흥위씨 종가의 집터를 지나는데, 봉황새 한 마리가 푸드덕 하고 날아가는 것을 보고 그 터에다가 집을 짓게 되었다. 그 후 봉두마을이 형성되었으며, 그때 지은 집이 약 100년이 지난 몇 년 전까지 있었다고 한다.
1982년 15대 종손인 위상복 씨가 그 집을 헐고 새로 집을 짓게 되었는데, 지금도 그 집 후원 한복판에 반경 1m 정도의 원안에는 아무리 눈이 많이 와도 쌓이지 않고 눈이 오자마자 녹아버린다고 한다. 그것은 봉황이 알을 품고 있어 따뜻한 기운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라 한다. 특히 묘한 것은 봉황새가 번식하는 데 있어서 반드시 암수를 구별하여 숫봉은 일정치 않지만 암봉은 일정하게 1회에 한 마리밖에 낳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래서인지 위효정의 자손이 현재 17세손까지 내려왔어도 딸은 모두 합해도 한 사람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동성동의 용성마을은 고려 후기 어느 촌로가 지금의 용성마을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스님과 대화를 나누면서, ‘영취산의 운이 이곳에 도착했다.’라고 하여 마을 이름을 복곡이라고 불러왔다. 그런데 어느 날 여수 지역 명사찰의 큰스님이 복곡마을에 들러 시주를 와서 보고는 마을의 형상이 용이 하늘로 승천하는 형국이요, 삼면이 바다로 성을 쌓아둔 것 같고, 마을 앞에 있는 섬은 꼭 진주 모양으로 용이 진주를 입에다 물고 하늘로 승천하는 모습이라고 말해줘서 1390년경부터는 마을 이름이 용성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위 두 예는 마을의 입지가 좋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 밖에도, 마을에 관한 풍수는 마을 뒷산의 형국이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바라보는 형국이라는 고막마을이 있으며, 고려 후기 신돈이 봉황새의 출입을 막으려고 오동도의 오동나무를 모조리 베어 버리도록 했다는 오동도 풍수설 등 마을 지명과 관련한 풍수설은 몇 곳이 더 있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사람이 살 만한 조건으로 지리(地理), 생리(生利), 인심(人心), 산수(山水) 등 넷을 들고 지리를 가장 으뜸으로 삼았다. 이는 마을의 지형이나 지세 등 자연적인 조건이 인문 사회적 조건보다 앞선다는 논리로 역시 양택 풍수에 속한다.
우리나라 전통 마을의 입지 유형을 최창조(崔昌祚)는 1990년 자신의 저서 『한국의 풍수사상』에서 다섯 가지로 나누고 있다. 내륙분지상(內陸盆地狀), 지세의 취락, 연해 취락, 평야의 취락, 어촌과 산촌이 그것이다. 여수 지역은 연해 취락에 해당하는데, 바닷가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 잡아 있는 것이 특이하다고 지적하였다.
또한, 집 자리로는 향일암이 위치한 금오산이 명당이라 한다. 이곳은 예로부터 풍수지리설로 거북이의 형국이라고 해서 영구암으로도 널리 알려졌다. 이 같은 지형설을 뒷받침하듯 향일암을 오르는 돌계단이나 주변의 바위들은 모두 거북등처럼 쩍쩍 갈라져 있다. 멀리서 금오산을 살펴보면 거북의 머리와 목 그리고 몸체의 형상이 완연히 나타난다. 거대한 거북이가 넓은 대양으로 헤엄쳐 가는 자태를 취하고 있으며, 그 등 위에 향일암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풍수지리 설화에는 묏자리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미평동과 둔덕동을 경계로 하는 나지막한 산이 있는데, 이를 중산이라 한다. 현재 여수대학교가 자리하고 있는 곳이다. 이곳은 여수 광산김씨의 선대가 묻혀 있는 세장산으로 풍수지리설에서 노룡(老龍)이 여의주를 앞에 놓고 유희하는 혈이 있는 명산으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300년 전, 중산 건너편 석교마을 관로 변에 광산김씨 부부가 행인을 상대로 국밥 장사를 하며 어렵게 살아가고 있었다. 한해 겨울 밤 사이에 한 길이 넘게 대설이 쌓여 행인들이 조금도 걸어갈 수가 없게 되었다. 그때 마침 처마 밑에서 추위에 떠는 노승을 발견한 주인 김씨는 노승을 방으로 안내하여 몸을 녹이게 한 후 따끈한 국밥으로 허기를 면하게 해주었다. 정신을 수습한 노승은 해가 저물어지자 단칸방에서 주인 부부와 같이 밤을 새우기가 난감하다고 판단되어 기어코 길을 뜨려고 했다. 이를 눈치 챈 김씨는 부인을 이웃집으로 보내고 스님과 같이 밤을 새웠다.
이튿날 스님은 김씨에게, 목숨을 살려준 어젯밤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양친 부모를 모실 묘지를 일러주고는 바람같이 길을 떠났다. 김씨는 스님의 말대로 이듬해 삼월 삼짇날 그곳으로 부모의 묏자리를 옮겼다. 이러한 일이 있은 뒤부터 국밥이 평소보다 많이 팔려 날이 갈수록 살림살이가 불어나기 시작했으며 스님의 예언대로 그로부터 10대에 와서 광산김씨 집안에서 많은 인물이 출세하고 향리에서 굴지의 재력가도 나왔다. 그래서인지 여수 지역 사람들은 중산은 송장을 거꾸로 뉘어 놓아도 해를 보지 않는 명산이라고 말하고 있다.
봉계동 월앙마을은 북쪽에 전봉산과 동쪽에 호랑산이 있는데, 전봉산의 줄기는 봉이 날개를 펴는 모습이고, 호랑산 줄기는 호랑이가 앞발을 버티는 형국이라고 한다. 또 월앙마을은 두 개의 높은 산 때문에 한밤중이 되어야 달을 볼 수 있다고 하여 월앙골이라고 불렀으며, 구름 가운데 비치는 달이라 하여 운중반월이라 불렀다. 운중반월이란 명당자리가 이곳에 있다는 뜻이라 한다.
풍수라 하면 우선 음택을 연상할 정도로 이에 대한 집념은 아직도 강하게 남아 있다. 지덕(地德)을 입어 망인의 혼이 안정되기를 바라며, 나아가 자손들에게 발복이 있기를 기대하는 마음과 조상에 추원보본(追遠報本)하는 유교적 관념이 자신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일 것이다. 음택이 양택 풍수보다 오히려 더 성한 것도 바로 이 이유에서일 것이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지형의 생김새가 미신·풍수설·전설 등과 어울려서 지명이 된 예도 있다. 여수시 남산동과 화양면 안포리 세포마을 끝의 닭머리[鷄頭], 돌산읍 우두리의 쇠머리[牛頭], 남면 유송리 북서 끝의 용머리[龍頭] 등이 그렇다. 돌산읍에는 자연마을 굴구지가 있고 그 앞에 장개도가 있다. 굴구지에서 불을 피우면 장개도에서 연기가 났다고 하는 전설이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일본군들이 굴구지마을에 들어와 풍수지리로 보니 장차 큰 인물이 태어날 곳이라 하여 해상을 봉쇄하고 이 혈맥을 끊어 버렸다고 한다. 풍수지리설의 이러한 자연의 이치도 천리와 지리의 조화 형상을 인간들이 이용한 것이라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