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6000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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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九萬浦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시설 |
지역 |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구만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근대/일제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최원회 |
최초 설립지 | 구만포 - 충청남도 예산군 고덕면 구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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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충청남도 예산군 고덕면 구만리에 있었던 포구.
[개설]
구만포(九萬浦)는 조선시대 충청도 연안에서 조운로에 연결되었던 중요한 포구로서 삽교천 유역에서 상업적 적환지(積換地)[운송 과정에서 운송 수단이 바뀌는 지점] 역할을 하였다. 아산만에서 뱃길로 벼 9만섬을 실어날랐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조선 중기 이후 장시가 발달하고, 조운이 발달하면서 성하였다가 조선 후기 들어 조운이 쇠퇴하고 도로, 철도의 육상교통이 발달하면서 포구 기능이 퇴락하였다. 구만포는 1868년 오페르트(Ernst Jacob Oppert)가 남연군묘를 도굴하기 위해 덕산에 왔을 때 배를 댄 포구로도 유명하다.
[건립 경위]
육지에서 생산한 곡식과 내포에서 생산된 소금 등을 한양 등 여러 지역으로 보내기 위해 포구가 형성되었을 것이다.
[변천]
조선시대에 태안반도 가야산 일대의 내포 지역은 한양으로 조운이 연결되고 수도를 방어하는 중요한 길목에 있었다. 조선시대 덕산현의 구만포 역시 충청 지역의 삽교천 유역에서 둔곶포(頓串浦)와 더불어 영향력 있는 포구의 하나였다. 구만포는 19세기 중엽에 발간된 『대동지지(大東地志)』에 기록된 충청도의 주요 포구 16곳 중 하나였다. 구만포는 삽교천이 조석의 영향을 많이 받아 만조 때는 선박이 예산군 고덕면 구만리까지 올라 왔었기에 형성되고, 발전되었다.
구만포는 삽교천을 따라 형성된 평야지대에서 생산되는 곡물이 모여, 선박을 통해 타 지역으로 나가는 내륙 거점의 포구의 역할을 하였다. 19세기 말 개항 이후에는 청나라 상인의 충청남도 지역 상업 활동의 거점 포구로서 서양목, 중국 비단, 잡화 등이 들어오고 많은 곡물이 반출되는 적환지 역할을 하였다.
구만포는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통폐합 이전에는 덕풍현(德豊縣) 도용면에 속하였고, 이후에는 예산군 고덕면 구만리에 속하였다.
[현황]
구만포는 1970년대까지도 서해와 내륙의 물산을 삽교천을 통해서 연결하는 내포 포구로서 기능을 하였으나 점차 그 기능이 퇴락하여 1970년대 이후엔 영세한 어촌 수준의 포구로 전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