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6003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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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井道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충청남도 예산군 |
시대 | 고려/고려 전기,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곽호제 |
[정의]
조선시대 청양을 중심으로 충청도 서부 지역과 연결된 역도.
[개설]
금정도(金井道)는 조선 세종 때부터 충청우도에 편성된 역도(驛道)였으며, 관할 범위는 대흥(大興)-청양(靑陽)-결성(結城)-홍주(洪州)-보령(保寧)-해미(海美)-서산(瑞山)-태안(泰安) 등의 지역으로 연결된다. 조선 후기에는 전기부터 편제되었던 시흥도가 폐지되면서 시흥도 소속의 8역이 금정도 관할 하에 편제되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역(驛)은 고려와 조선시대에 공문의 전달과 사신 및 관리의 여행에 마필(馬匹)을 제공하고 변방의 군정을 보고하던 곳이었으며, 숙식 편의를 제공하던 원(院)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역원(驛院)이라 통칭되었다. 역도는 도로의 상태와 중요도 및 산천의 거리에 따라 여러 개의 역을 묶어 찰방(察訪)[종6품]이나 역승(驛丞)[종9품]의 지휘 감독 아래 순행(巡行)·고찰(考察)하면서 역을 관리하는 체계이다. 전국의 각 역에는 찰방, 역승의 관장 하에 역장(驛長)·역리(驛吏)·역졸(驛卒) 등을 두어 역정(驛政)의 관리와 공역을 맡게 하였다.
[관련 기록]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149권 충청도조에서 “감목관(監牧官)이 1명이요, 역승이 9명이다. … 금정도의 관할 역이 11곳이요, 광시·세천·용곡·급천·순성·흥세·풍전·하천·몽웅·해문·청연[監牧官一人 驛丞九人. … 金井道所管驛十一, 光時, 世川, 龍谷, 汲泉, 順城, 興世, 豐田, 下川, 夢熊, 海門, 淸淵].”이라 하였다.
『세조실록』 29권, 세조 8년(1462년) 8월 5일 정묘조에 “병조에서 아뢰기를, 이보다 먼저 제도(諸道)의 참역 또는 역승을 파하고 각각 그 부근에다 합하여 하나의 길을 만들어서 찰방을 두었으나, 관할 역이 많고 길이 멀리 떨어져서 찰방이 두루 살피기가 어려우므로 역로(驛路)가 조잔(凋殘)하니, 이제 다시 마감(磨勘)하여 대·중·소의 역로 및 원근을 나누어서 그 전의 역승을 각 역로에 차견(差遣)하여 찰방마다 역승 1명을 더 두게 하소서. 삼가 뒤에 갖추어 아룁니다. ... 시흥역·창덕역·일흥역·화천역·장시역·순성역·흥세역·급천역 이상 8역은 시흥도승(時興道丞)으로 일컫고[兵曹啓, 在先諸道站驛或罷, 驛丞各以附近合爲一道置察訪, 然所管驛多道里遙隔, 察訪未易遍察, 驛路凋殘, 今更磨勘分大中小驛路及遠近, 已前驛丞差遣各路, 每一察訪加設驛丞一. 謹開具于後. ... 時興驛, 昌德驛, 日興驛, 花川驛, 長時驛, 順城驛, 興世驛, 汲泉驛 已上八驛, 稱時興道丞]”라고 하였다.
[변천]
금정도는 세종 때부터 시흥도(時興道)·이인도(利仁道)와 함께 충청우도에 편제된 역도의 하나였다. 세종 때 금정도는 금정역 소속의 12역을 관할하였고, 세조 때에는 9역이 역승의 관할 아래 있었다. 1452년(단종2)의 『세종실록지리지』에는 광시(光時)[예산군 광시면]·세천(世川)[홍성군 홍성읍]·용곡(龍谷)[청양군]·급천(汲泉)[예산군 덕산면]·순성(順成)[충청남도 당진군 순성면]·흥세(興世)[당진군]·풍전(豐田)[서산시]·하천(下川)[충청남도 태안군]·몽웅(夢熊)[서산시 해미면]·해문(海門)[홍성군 결성면]·청연(靑淵)[충청남도 보령시]이 금정도의 관할 하에 있었으나 1462년(세조 8)의 『세조실록』 8년 8월 5일에는 급천·순성·흥세 3개 역이 시흥도 소속으로 개편되었다.
숙종 연간에 간행된 『전록통고(典錄通考)』 이전(吏典) 외관직(外官職) 충청도(忠淸道) 역승(驛丞)조에 금정도 소속의 9역과 시흥도 소속의 8역이 별도로 기록[驛丞三員 利仁道屬驛, 龍田·恩山·楡楊·宿鴻·藍田·靑化·豆谷·新谷·靈楡·金井道屬驛, 光時·海門·靑淵·世川·龍谷·夢熊·下川·豐田·時興道屬驛, 昌德·日興·汲泉·順城·興世·長時·花川]되어 있으나, 1757년(영조 33) 간행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시흥도에 소속되었던 8역이 금정도 소속으로 기록되어 있다. 1700년을 지나면서 시흥도가 폐지되면서 시흥도 소속의 8역이 금정도 소속의 9역과 함께 금정도 찰방의 관할로 통합된 것이다.
금정도의 소재지는 본래 현재의 청양군 남양면에 있었으나, 언제인지 확인할 수 없지만 용곡역(龍谷驛)[현재의 청양군 화성면 용당리]으로 이전되었다.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 충청도 홍주목 역원조에 금정역의 현황이 다음과 같이 수록되어 있다. “홍주 남쪽 40리[약 15.71㎞]에 있고, 찰방 1명[음관 6품]과 역리[屬吏] 121명, 노(奴) 175명, 비(婢) 21명, 상등마 2필, 중등마 4필, 하등마 5필을 두었다[金井驛在州南四十里察訪一員蔭官六品置其屬吏一百二十一人奴一百七十五名婢二十一名上等馬二匹中等馬四匹下等馬五匹].”
금정도는 근대화 과정에서 정치·사회제도가 변화하고, 교통이 발달하면서 폐지되었다. 즉 1896년(건양 1) 1월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금정도는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의의와 평가]
금정도는 조선시대에 국가에서 지방의 공무수행 관리에게 역마 및 숙박 편의를 제공하고 중앙과 지방의 연락 업무를 목적으로 설치되었던 교통·통신제도이다. 국가경영상 중요한 기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품계가 높지 않은 찰방과 역승의 관할 아래 있었고, 역제(驛制) 운영상 폐단이 많아지면서 편제의 변화를 초래하였다. 현재 ‘역’ 자가 ‘역말’, ‘역촌’ 등의 지역 명칭으로 사용되는 곳이 그 기능을 하였던 곳이었음을 알 수 있을 뿐, 거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