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6003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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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乙未洪州義兵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충청남도 예산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문경호 |
[정의]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맞서 예산을 비롯한 홍주 일대에서 일어난 의병 활동.
[개설]
을미홍주의병은 을미사변과 단발령으로 인해 예산, 대흥, 청양, 홍주 지방에서 일어난 의병이며, 유생과 현직 관료 출신의 의병장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을미홍주의병은 대흥군수 등 현직 관료들의 참여를 이끌어 냈으며, 세력을 규합하여 홍주성에 입성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관찰사 이승우(李勝宇)의 배신으로 의병장들이 체포되면서 해산하였다.
[역사적 배경]
1895년 일본인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당하는 을미사변과 을미개혁[3차 갑오개혁]으로 선포된 단발령을 배경으로 하여 예산, 청양, 홍성 등에서 을미홍주의병이 발생하였다.
[경과]
을미홍주의병은 1895년 5월, 예산 광시 은사리의 유생 박창로(朴昌魯)와 청양 유생 안창식(安昌植) 등이 처음 모여 논의하였으며, 1895년 8월 을미사변 직후에 송병직(宋秉稷), 조병고(趙秉皐) 등이 합류하고, 1895년 11월 단발령 공포 이후에 전직 관료였던 지산(志山) 김복한(金福漢), 이설(李偰), 그리고 채광묵(蔡光默) 등이 참여하면서 본격적으로 일어나게 되었다.
학식과 명망이 높았던 중심인물 김복한이 홍건(洪健)과 더불어 관찰사 이승우를 설득하여 참여시켰고, 이어서 대흥군수 이창세(李昌世) 등 인근 지역의 여러 현직 군수들이 참여하게 되자 안병찬과 채광묵이 1896년 1월 13일에 예산, 청양, 부여, 정산, 홍산 지역에서 모은 의병 180여 명을 이끌고 홍주성에 입성하였다. 이어서 청양의 이봉학, 이세영과 광시의 박창로가 각각 선비와 의병 수백 명을 이끌고 합류함으로써 홍주창의소(洪州倡義所)가 세워졌다. 의병장 김복한은 그동안 일본에 붙었던 관리들을 동문 밖으로 끌어내어 태형을 가하도록 명령하였으며, 박창로와 정제기 등을 시켜 장기적인 싸움에 대비하기 위해 대흥의 임존산성을 수리하도록 하였다.
[결과]
관찰사 이승우가 홍주성 안의 의병이 부족한 틈을 타서 아전들과 결탁하여 김복한, 이설, 안병찬 등을 체포하자 홍주성 안의 의병들이 동요하여 흩어졌으며, 인근에서 의병을 모아 홍주로 향하던 대흥군수 이창세 등도 소식을 듣고 되돌아가면서 의병 항쟁은 좌절되고 말았다.
[의의와 평가]
을미홍주의병은 충청남도에서 발생한 전국 최초의 의병이었으며, 비록 일시적이었으나 관찰사 이승우를 비롯한 인근 지역의 여러 현직 군수들이 참여한 의병이라는 점에 의의가 있다. 또한, 을미홍주의병은 실패로 끝났으나 체포된 의병장들은 고종에 의해 사면되어 이후 을사홍주의병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