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6003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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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獨立運動 |
이칭/별칭 | 3.1운동,김한종,예산청년회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남도 예산군 |
시대 | 근대/일제강점기 |
집필자 | 김상기, 문경호 |
[정의]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예산 지역과 해외에서 전개한 항일 독립운동.
[개설]
예산의 독립운동은 구한말 국권회복운동 이후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예산인들은 한말 홍주의병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애국계몽운동과 국채보상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일제강점기 대한광복회 충청도지부에서 활약한 김한종 의사의 독립운동을 시작으로 3.1운동, 사회주의 운동, 학생운동 등 시기별로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윤봉길을 비롯한 예산 출신 독립운동가들은 해외로 망명하여 목숨을 바쳐 독립투쟁을 펼쳤다.
[한말 예산 지역의 독립운동]
한말 국권회복운동은 의병투쟁과 애국계몽운동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예산 지역에서의 의병투쟁은 1896년과 1906년에 전개된 홍주의병이 대표적이다. 1896년 홍주의병은 홍주 일대의 사민들이 일으켰다. 홍주의병에 참여한 예산 출신 인물로 박창로(朴昌魯)와 이봉학 등이 있다. 박창로는 수백 명을 이끌고 홍주성에 들어가 김복한을 창의대장에 추대하고 활동하였다.
홍주 일대의 시민들은 1906년 3월 을사늑약에 항의하여 의병을 재기하고 민종식(閔宗植)을 의병대장에 추대하였다. 민종식은 3월 15일[음력 2월 21일] 의병장에 올라 예산의 광시에서 의병을 봉기하였다. 이들은 광시에서 편제를 정하고 대장단을 세워 천제를 올렸다. 합천전투에서 패퇴한 민종식은 각지를 잠행하다가 부여의 지티에서 의병을 재기하였다. 의병은 남포전투를 승리한 후 5월 19일 홍주성을 공격하여 다음 날 점령하였다. 몇 차례의 일본 경찰과 헌병대의 공격에도 전세가 의병 측에 유리하게 전개되자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주차군 사령관에게 군대 파견을 명령하였다. 결국 홍주의병은 일본군의 화력에 밀려 참모장 채광묵 부자 등 300여 명이 전사하였다. 홍주의병에 참여한 예산인은 이남규(李南珪)를 비롯하여 성재한, 박창로, 남규진(南奎振) 등이 있다. 성재한은 의진의 운량관(運糧官)이 되어 홍주성 전투에 참가하였다. 일본군의 총공격에 형세가 기울자 민종식 등은 성을 넘어 피신하였다. 그러나 성재한은 “나는 중한 책임이 있다. 이 문부(文簿)들을 안고 장차 어디로 간단 말이냐.” 하고 전사 순국하였다. 이남규는 합천전투에서 안병찬 등이 체포되자 이들의 구명운동을 하면서 적극적으로 홍주의병에 참여하였다. 의병의 재기를 두려워 한 일제는 1907년 9월 이남규를 체포하여 아산에서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박창로는 청양의 합천전투에서 안병찬 등과 함께 체포되어 공주감옥에서 옥고를 치르고 난 뒤에 다시 의병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남규진은 홍주성전투에서 체포되어 쓰시마에 유배되어 2년 이상 고초를 겪었다.
예산 지역에서의 애국계몽운동 중 대표적인 것으로 국채보상운동이 있다. 예산에서는 1907년 3월부터 의연금모집소를 설치하고 의연금 모금을 추진하여 취지서를 발표하고 운영 방안을 발표하며 의연금을 모금하였다. 덕산에서도 국채보상수합소를 설치하여 신문에 취지서를 발표하고 의연금 모금에 나섰다. 대흥군에서도 6월부터 모금운동을 전개하였다. 모금 활동은 11월 중에 가장 활발하여 성황리에 이루어졌다.
[1910년대의 독립운동]
1910년 국권을 강탈한 일제는 포악한 무단통치를 강행하였다. 1910년대의 예산 지역에서의 독립운동은 독립의군부와 대한광복회 등의 비밀단체 활동으로, 그리고 3.1운동으로 나타났다. 독립의군부 예산군의 대표는 홍주의병에 참여하고 쓰시마에 유배되었던 남규진이었다. 김한종 의사는 조선총독 암살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1916년에 경상도로 피신하였다가 1917년에 대한광복회에 가입하였다. 김한종의 가입으로 경상도를 중심으로 활약하던 대한광복회가 충남 지역에 기반을 갖게 되었다. 예산군 광시 출신의 김한종(金漢鍾)이 충남지회를 설립하고 회장을 맡았다. 김한종은 예산과 연기에 곡물상을 두어 거점으로 삼고 타 지역에 비해 투쟁적으로 활동하였다. 광복회에 참여한 예산 출신으로는 김한종을 비롯해 김한종의 아버지인 김재정과 김재풍(金在豊)·김재창(金在昶)·김재철(金在哲) 등 김녕김씨 문중 인물들과 김한종의 제자인 김상준(金商俊)·이재덕(李在德) 등이 있다. 대한광복회 충청도지부는 군자금 모금의 과정에서 전혀 협조하지 않거나 일경에 밀고한 도고면장 박용하(朴容夏), 경북 칠곡의 친일 부호 장승원(張承遠) 등을 처단하고, 만주의 책임자로 김좌진을 파견하였으며, 군자금 모금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특히 박용하의 처단은 충남지회의 책임자인 김한종과 장두환 등에 의해 1918년 1월 단행되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예산 곳곳에서도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예산면에서는 3월 3일 밤에 예산 읍내 동쪽 산 위에서 읍민들이 독립만세를 외쳤으며, 31일 예산 장날에 60여 명의 군중이 독립만세를 부르며 예산군청과 예산 헌병분대 앞에서 시위를 벌이다가 체포되기도 하였다. 이와 유사한 만세운동이 대흥면, 광시면, 신양면, 대술면 등 예산 전 지역에서 일어나 11개 읍면과 30여 개소에서 연인원 5,500여 명이 참가하였다. 예산 3.1운동은 30대와 40대의 인사들이 확고한 지역적 기반을 바탕으로 전개한 특징을 보였다. 그러나 일제 경찰, 헌병 및 보병들의 탄압으로 7명이 순국하고, 10여 명이 부상을 당하였으며, 30여 명이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다. 덕산 출신의 박인호는 천도교 대도주로서 3·1운동의 중앙지도체 49인 중 한사람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대 이후의 독립운동]
3.1운동 이후 사회주의사상이 확산되고, 산미증식계획과 일본인 회사의 한반도 진출 등으로 한국인들의 삶이 피폐해지자 이에 맞서 소작쟁의, 노동쟁의 등이 확산되었다. 『중앙일보』 1934년 5월 5일 기사에 따르면 이전 1개월간 예산의 소작쟁의가 40여 건이나 발생했다고 보고되었다. 노동쟁의의 경우 1920년에 조선노동공제회, 1926년에 ‘대흥익명조합’ 등이 결성되어 예산 지역의 노동운동을 이끌었으며, 1922년에는 경남선[장항선]이 개통되어 철도 하역 관련 노동자가 급증하였다. 1926년에는 충남제사주식회사가 예산 주교리에 건립되면서 여성노동자들의 수가 크게 증가하였다. 초기의 노동쟁의는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의 성격이 강하였으나 점차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민족운동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한편, 이 시기 예산의 민족주의자들은 예산청년회의 주도로 민립대학설립운동과 물산장려운동을 전개하였다.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언론의 후원 아래 전개된 물산장려운동은 민족자본의 열세와 일본의 방해, 궁핍해진 농민들의 참여 저조 등으로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1923년 8월 12일에는 민족주의 인사들이 예산공립보통학교에서 민립대학설립운동 지방부(地方部)를 조직하였다. 이에 신익교, 최규석 등 예산의 유지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이외에도 1920년대 이후에는 대흥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항일운동을 비롯한 학생운동과 백정들의 신분 차별 철폐운동인 형평운동, 예산청년회와 같은 지역 청년 단체를 중심으로 전개된 청년운동, 신간회 조직 등과 같은 민족운동이 전개되었다.
1920년대 학생들은 일제의 노예적인 식민지 교육에 항거하여 동맹휴학을 벌였다. 예산공립농업학교에 재학 중이던 정종호(鄭鍾浩)는 강봉주(姜鳳柱), 한정희(韓定熙) 등과 비밀리에 독서회(讀書會)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이들은 한인 학생의 차별 개선과 한인 교사의 확대 등을 주장하며 동맹휴학을 주도하였다. 예산에서의 신간회운동 역시 활발히 전개되었다. 예산지회는 1927년 11월 이승복(李昇馥)이 이관용(李灌鎔), 권태석(權泰錫) 등과 함께 주도하여 조직하였다. 예산 지역 농민운동으로는 특히 소작쟁의가 많았다. 예산군 오가면 면민들은 1923년 8월 예산공립보통학교에서 면민대회를 개최하고 일제의 수리조합과 농장 설치를 반대하였다. 옥계리에서는 1924년 3월에 마름의 무리한 소작권 이동으로 인해 쟁의가 일어났다. 1926년 2월에도 삽교면 용동리에서 마름의 횡포에 항의하여 쟁의가 있었다.
[일제강점기 예산인의 해외에서의 독립운동]
예산 출신 인사들은 1945년 광복을 쟁취할 때까지 해외로 망명하여 다양한 방법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중국으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여 활동하였으며,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고 무장투쟁을 벌였다. 그중에는 윤봉길(尹奉吉), 신현상(申鉉商)과 같이 대표적인 인물들도 있다.
윤봉길은 공동묘지 묘표사건을 계기로 민족의 무지가 나라를 잃게 하였음을 깨닫자 야학당을 개설하였다. 1927년 4월 월진회를 조직하고 회장에 추대되었다. 농민운동의 한계에 대하여 고민하던 중에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다음 해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상하이에서 김구의 알선으로 박진이 경영하는 모자 제조공장인 중국채품공사에서 직공으로 일하면서 한인공우친목회를 조직하는 등 활동하였다. 1932년 1월 이봉창의거 후에 김구를 만나 자신이 상하이에 온 뜻을 밝히고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여 4월 29일 의거를 감행하였다. 상하이의거는 대성공이었다. 단상에 있던 상하이파견군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대장을 처단하였으며, 해군사령관 노무라 요시사부로[野村吉三郞] 중장, 제9사단장 우에다 겐키치[植田謙吉] 중장, 주중공사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 등에게 중상을 입혔다. 상하이의거는 상하이를 침략한 일본군 수뇌부를 섬멸함으로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으며, 한민족의 독립정신과 의지를 전세계에 알리는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일제의 만보산사건 조작으로 야기된 한중 양 민족의 반감을 회복, 강화하여 중국 지역에서 한국 독립운동을 다시 가능하게 하는 여건을 마련하였다. 또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활동을 비롯한 한국 독립운동을 활성화시키는 결정적인 전기를 마련하였다.
신현상은 1929년 상하이노동대학을 수료하고, 1929년 임시정부의 지령을 받고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서 국내로 돌아왔다. 신현상은 예산에서 정미업을 하던 최석영(崔錫榮)의 협조를 받아 1930년 2월 호서은행 예산지점에서 위조 환증을 이용하여 5만 8000원을 인출하는 데 성공, 중국으로 탈출하였다. 신현상은 베이징에서 정화암(鄭華岩) 등에게 군자금 일부를 전달하여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을 조직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1930년 4월 톈진 일본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1930년 12월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4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박우균(朴禹均)은 1924년 중국의 황포군관학교 5기생으로 입교한 후 다시 무한분교 포병과에 입학하였다. 유악한국혁명청년회에 참가하여 유자명 등과 함께 민족협동전선운동의 구심적 역할을 하였으며, 중국국민당 정부의 승인 하에 북벌에도 참가하였다.
이와 같이 예산 지역에서는 한말 의병운동과 애국계몽운동,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일제 강점기 예산인들은 국내에서는 1910년대 대표적인 비밀단체인 광복회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예산에서의 3.1운동은 광범하게 전개되었다. 1920년대 이후 예산에서는 민립대학기성회 활동과 신간회운동, 학생운동 등 국내에서의 민족운동이 활발하였다. 예산 출신 독립운동가들은 해외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활발히 펼쳤다. 상해 의거를 성공리에 수행한 윤봉길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호서은행 사건의 주역 신현상과 군자금 모금운동을 펼친 김영진, 황포군관학교 출신의 박우균도 예산 출신이다. 이들 외에도 많은 이들이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