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600379
한자 新幹會禮山支會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충청남도 예산군
시대 근대/일제강점기
집필자 문경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27년 11월 14일연표보기 - 신간회 예산지회 창설
해체 시기/일시 1931년연표보기 - 신간회 예산지회 해소
최초 설립지 예산예배당 -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읍 예산로 202번길 8[예산리 441-5]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단체

[정의]

일제 강점기 충청남도 예산 지역에 있었던 신간회 소속 지회.

[개설]

1920년대 국내에서는 일제의 민족 분열 통치로 인해 민족주의자들이 자치론자와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로 분열되었다. 사회주의자들 또한 1925년 제정된 치안유지법으로 인하여 활동에 많은 제약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중국에서 1924년 제1차 국공합작이 결성되고, 안창호를 중심으로 한국독립유일당 북경촉성회가 설립되는 등 민족유일당 운동이 곳곳에서 전개되자 국내에서도 1927년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 연합하여 민족공동전선으로서 신간회를 설립하였다. 신간회는 설립 이후 전국적으로 약 150여 곳에 이르는 지회가 설립되었는데, 충청남도 예산에서도 민족공동전선의 열망에 힘입어 1927년 11월 14일 신간회 지회가 창설되었다.

[설립 목적]

신간회 지회가 전국으로 확대됨에 따라 1927년 11월 4일 대회준비위원 14명을 중심으로 예산지회 설립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11월 14일 예산예배당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다. 창립총회에서 이종승(李鍾承)이 회장으로, 김진동(金振東)이 부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69명의 회원을 둔 예산지회가 창립되었다. 같은 해 12월 9일 개최된 정기총회를 통해 조직이 개편되어 회장에 김진동, 부회장에 윤상보(尹商普)가 선출되는 등 활동을 이어갔다.

[변천]

1929년 8월 신간회 본부의 지시에 따라 신간회 예산지회에서 임시대회가 소집될 예정이었으나, 임시 대회를 준비하던 기간인 1929년 8월 11일 회원 성락훈, 홍병철 등이 검거되는 등 예산경찰서의 습격을 받아 취소되었다. 습격 사건으로 인해 이후의 신간회 예산지부의 활동은 위축되었다. 사회주의자들의 노선 변화와 국내 지도력의 부족 등의 한계로 인해 신간회가 1931년 해소를 결정함에 따라, 신간회 예산지회도 해소되었다.

[현황]

신간회 예산지회가 창립된 예산예배당은 이를 계승한 예산제일감리교회가 이전함에 따라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예산예배당 터에는 상가가 들어서 있다.

[의의와 평가]

1927년 결성된 신간회는 국내외적으로 전개된 민족유일당 운동이 결실을 맺은 것으로, 이념과 노선을 초월한 민족공동전선이었다. 충청남도 예산 지역 역시 신간회 지회가 설치됨으로써 이러한 이념과 노선을 초월한 공동전선이 예산 지역에서도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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