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6005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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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絿墓域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능묘 |
지역 |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종경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해준 |
조성 시기/일시 | 1534년 - 김구 묘역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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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장자 생년 시기/일시 | 1488년 - 김구 출생 |
피장자 몰년 시기/일시 | 1534년 - 김구 사망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640년 - 김구 묘비 건립 |
현 소재지 | 김구 묘역 -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종경리 |
성격 | 묘 |
양식 | 봉토묘 |
관련 인물 | 김구 |
소유자 | 광산김씨 종중 |
관리자 | 광산김씨 종중 |
[정의]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종경리에 있는 조선 전기의 문신 김구의 묘.
[개설]
김구 묘역은 조선 전기 문신 김구(金絿)[1488~1534]의 묘역으로 예산군 신암면 종경리에 있다. 김구 묘역이 있는 종경리는 아버지 김계문의 처가인 전의이씨의 세거지이자 김계문이 입향하여 사망한 곳이며, 이후 광산김씨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룬 곳이다.
김구는 자가 대유(大柔), 호는 자암(自庵), 본관은 광산으로 서울 연희방에서 태어났다. 김구의 아버지 김계문은 대흥현감을 역임하던 중 부인 전의이씨의 문중이 세거하고 있던 예산현 입암면(立岩面)[현 신암면]에 입향하였다. 이후 김구의 거주지는 서울 인수방(仁壽坊)이었지만 예산군 신암면과도 깊은 인연을 맺는다. 김구는 어려서부터 성실하고 문재가 뛰어났다고 전하며 김굉필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김구의 학문은 도학을 주로 하는 경학 연구는 물론이고 시문에도 능숙하였고 특히 음률에도 능통해 중종 때 악정(樂正)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글씨에도 뛰어나 안평대군 용·양사언·한호 등과 함께 조선시대 전기 서예계의 4대가로 손꼽힌다. 서체가 강건하고 독특하여 김구가 살았던 인수방의 이름을 따서 ‘인수체(仁壽體)’라고 하였으며 중국까지 이름을 떨칠 정도였다.
16세와 20세에 각각 한성향시·사마시에서 장원하였고, 이후 승문원 부정자로 출사하여 청요직을 두루 역임하며 승진을 거듭하다 1519년 32세 때 홍문관 부제학에 올랐다. 조광조와 더불어 왕도 정치의 쇄신을 꾀하다가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개령, 남해, 임피 등으로 14년간 유배되었다가 1533년[중종 28] 풀려났다. 김구는 남해에서 유배 생활 중에 부모의 사망 소식을 듣고 시묘를 살았다. 중종이 입궐할 것을 명하였으나 시묘하기 위하여 응하지 않다가 부모의 묘소 앞에서 낙마한 후 얻은 병에 시묘의 비애가 겹쳐 결국 1534년 11월 47세로 사망하였다.
[위치]
김구 묘역은 예산군 신암면 종경리에 있는 신암면사무소에서 서북쪽으로 약 100m 떨어진 구릉에 있다.
[형태]
김구 묘역이 있는 곳은 용궁리 용산을 부모산으로 응봉의 팔봉산을 소조산으로 하고 소나무가 묘소를 병풍처럼 두르고 있어 용안청호(龍案靑虎)의 명당으로 꼽힌다. 아버지 김계문의 묘 아래에 김구 묘역이 조성되어 있으며 오른쪽으로 부인 김해김씨의 묘가 있다. 김구 묘 앞에는 상석과 묘비가 있고 문인석이 좌우로 2기 세워져 있다. 상석은 최근에 새것으로 교체하였고, 오른편의 문인석 옆에 옛 상석으로 추정되는 돌받침 하나 놓여 있다.
[금석문]
김구 묘비는 화강암으로 옥개형 이수를 올린 형태이다. 비신의 높이 158.5㎝, 폭 62㎝, 두께 16.7㎝이다. 1640년[인조 18] 건립된 것으로 묘비명은 김세렴(金世濂)이 찬하고 글씨는 외현손 안응감(安應鑑)이 썼다. 비신 앞면에는 ‘통정대부 홍문관지제교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 증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홍문관제학 예문관제학 동지경연의금부춘추관성균관사 자암 김선생 휘 구지묘 증 정부인 김해김씨 부좌(通政大夫弘文館知製敎 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 贈嘉善大夫吏曹參判 兼弘文館提學藝文館提學同知經筵義禁府春秋館成均館事 自庵金先生諱絿之墓, 贈貞夫人 金海金氏祔左)’라고 새겨져 있으며 『자암집(自菴集)』 부록에 비문 전체가 실려 있다.
[의의와 평가]
예산 신암면 종경리에 있는 광산김씨선영에는 자암 김구의 묘뿐만 아니라, 아버지 김계문의 묘와 그로부터 4대손의 묘역이 조성되어 있다. 조선시대 전중기 분묘 유적으로 희소가치가 크다. 김구의 묘비 또한 연대가 오랜 것으로 금석학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