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600545 |
---|---|
한자 | 趙克善墓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능묘 |
지역 | 충청남도 예산군 봉산면 시동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해준 |
피장자 생년 시기/일시 | 1595년 - 조극선 출생 |
---|---|
피장자 몰년 시기/일시 | 1658년 - 조극선 사망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894년 - 조극선 묘 묘비 건립 |
현 소재지 | 조극선 묘 - 충청남도 예산군 봉산면 시동리 |
성격 | 묘소 |
양식 | 봉토분 |
관련 인물 | 조극선 |
관리자 | 시동리 한양조씨 문중 |
[정의]
충청남도 예산군 봉산면 시동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문신 조극선의 묘.
[개설]
조선 후기의 문신 조극선(趙克善)[1595~1658]의 묘는 예산군 봉산면 시동리에 있다.
조극선의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유제(有諸), 호는 야곡(冶谷),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아버지는 조경진(趙景璡)이고, 박지계(朴知誡)·조익(趙翼)의 문인이다. 1623년(인조 1) 학행으로 추천되어 동몽교관(童蒙敎官)이 되었다. 병자호란 당시 벼슬을 그만두고 집에 있었다. 병자호란의 소식을 듣고 혼자 달려왔으나 천안에서 길이 막혀 부모와 함께 해도(海島)로 피난하였다. 이후 순창군수·형조정랑·사어 등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다가 1648년 온양군수로 나갔다. 효종이 즉위하면서 좌의정 조익의 강력한 추천으로 성균사업(成均司業)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학문에 정진하였다. 이후 조정에서 강화부사·순창군수·익산군수·공조정랑 등에 임명하였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나가지 않았다. 1657년(효종 8) 사헌부지평으로 나가 곧 장령이 되었다가 선공감첨정(繕工監僉正)이 되고, 1658년 다시 장령으로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망하였다.
저서로는 『야곡집』10권과 『야곡삼관기(冶谷三官記)』 등이 있다. 성리학과 예설에 밝은 학자로 이후 이조참의에 추증되었으며, 신창의 도산서원(道山書院)과 덕산의 회암서원(晦庵書院)에 제향되었다.
[위치]
조극선 묘는 시동리 마을회관에서 오른쪽에 있는 안시무골마을의 배산 구릉 상단에 남향하여 있다.
[변천]
조극선 묘는 원래 덕산현 대성산에 있었는데, 나라의 은전을 받은 후 예산군 봉산면 시동리로 옮겼다고 한다.
[형태]
조극선 묘 앞에는 상석, 동자석 1쌍, 망주석 1쌍, 묘비 1개가 세워져 있다. 묘로 올라가기 전에 효종의 어서(御書)를 판각하여 보관하고 있는 어서각이 있다.
[금석문]
조극선 묘비는 장방형의 대좌에 비신을 세우고 옥개형의 이수를 올린 형태이다. 비의 총 높이는 210㎝이고, 비신의 크기는 폭 46㎝, 두께 17㎝, 높이 137㎝이고, 대좌는 가로 85㎝, 세로 50㎝, 높이 43㎝이다. 묘비는 1894년 세워졌으며, 비신 앞면에 ‘유명조선국 통훈대부 행사헌부장령 증자헌대부 이조판서겸 성균관제주 익문목 한양조공 휘극선지묘 호야곡 증정부인 강화최씨부(有明朝鮮國通訓大夫行司憲府掌令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成均館祭酒謚文穆漢陽趙公諱克善之墓號冶谷贈貞夫人江華崔氏祔)’라고 쓰여 있다.
[의의와 평가]
조극선은 17세기 호서의 대표적인 지성인으로 효행과 학행으로 이름이 났으며, 효종이 조극선의 학행을 흠모한 사실이 『효종행장』에 기록되어 있다. 조극선은 자아 성찰을 중요시 여겨 매일 일기를 쓰며 관직 생활과 독서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인재일록』은 조극선이 1609~1623년[15~29세]까지 쓴 일기이고, 『야곡일록』은 1624~1635년[30~41세]까지 쓴 일기이다. 일기는 조극선의 청년 시절 수학기와 과거 시험 준비 등 당시 사회상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사료로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