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6005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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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趙克善神道碑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비 |
지역 | 충청남도 예산군 봉산면 봉산로 132[시동리 산2-1] |
시대 | 근대/일제강점기 |
집필자 | 이해준 |
건립 시기/일시 | 1929년 - 조극선 신도비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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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 1595년 - 조극선 출생 |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 1658년 - 조극선 사망 |
현 소재지 | 조극선 신도비 - 충청남도 예산군 봉산면 봉산로 132[시동리 산2-1] |
성격 | 신도비 |
양식 | 다작지붕|방형 대좌 |
관련 인물 | 조극선 |
재질 | 화강암 |
크기(높이, 너비, 두께) | 365㎝[총높이]|68㎝[비신 폭]|68㎝[비신 두께]|224㎝[비신 높이]|130㎝[대좌 가로]|50㎝[대좌 높이] |
[정의]
충청남도 예산군 봉산면 시동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문신 조극선의 신도비.
[개설]
조극선 신도비는 조선 전기의 문신 조극선(趙克善)[1595~1658]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1929년 건립되었다. 비문은 1680년(숙종 6) 윤증이 찬하였다. 조극선의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유제(有諸), 호는 야곡(冶谷)이다. 조극선은 조경진(趙景璡)의 아들이고, 박지계(朴知誡)·조익(趙翼)의 문인이다. 조극선은 1658년 1월 장령을 제수하고 패초(牌招)를 명받아 집을 나왔다가 궐문 아래에서 갑자기 중풍으로 쓰러져, 집으로 돌아가서는 이틀 후 경진일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효종은 조극선의 학행을 매우 흠모하였다고 한다. 조극선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효종은 관청에 명하여 초상을 치러 주게 하고, 의금(衣衾)과 관곽(棺槨) 등 제반 용품들을 모두 갖추어 주도록 하였으며, 어필(御筆)로 문금(文錦)과 현훈(玄纁)을 특별히 하사하였다. 또 연로(沿路)의 고을에 명하여 영구(靈柩)를 호송하게 하고 묘소를 조성할 인부를 지급하였다고 한다. 조극선의 저서로는 『야곡집』10권과 『야곡삼관기(冶谷三官記)』 등이 있다. 성리학과 예설에 밝은 학자로 이후 이조참의에 추증되었으며, 신창(新昌)의 도산서원(道山書院)과 덕산(德山)의 회암서원(晦庵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건립 경위]
조극선의 신도비는 명재(明齋) 윤증(尹拯)[1629~1714]이 1680년 찬하였으나 바로 비를 건립하지는 못하였다. 후손의 말에 따르면 묘소를 이전하는 과정에서 신도비 건립이 늦어져 후대에 세우게 되었다고 하며 관련된 내용이 비문에 기록되어 있다. 신도비 추기(追記)에 따르면 본래 조극선의 묘소는 대성산에 있었다가 조정의 은전을 받은 후 현재의 예산군 시동리로 옮겼고, 철종 대에 이르러 문목공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또한 조극선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1929년 박기양(朴箕陽)[1856~1932]이 전자(篆字)하여 세웠다고 쓰여 있다.
[위치]
예산군 덕산면 소재지에서 북서쪽으로 지방도609호선을 따라 1.5㎞ 들어가면 덕산중학교가 있는 하평리에 이른다. 도로의 왼쪽에 있는 하평교를 건너 약 2㎞ 정도 들어가면 시동리 입구 동쪽으로 조극선 신도비가 서향하여 있다.
[형태]
조극선 신도비는 방형의 화강석 대좌 위에 오석의 비신을 세웠다. 비신의 4면에는 세자로 행장을 새겨 놓았다. 비신의 위에는 비교적 정교하게 조각한 다작지붕 형식의 이수가 올려져 있는데 위에는 화려한 보주가 조각되어 있다. 비의 총높이는 365㎝이고 비신의 크기는 폭 68㎝, 두께 68㎝, 높이 224㎝이며, 대좌는 가로 130㎝, 높이 50㎝이다. 조극선 신도비의 둘레에는 철재로 된 낮은 보호시설을 설치하였다.
[금석문]
조극선 신도비에는 조극선의 학문을 칭송하고, 일생에 대해 기술하였다. 신도비에 따르면 조극선의 효성이 깊어 항상 부모 모시기를 하늘과 같이 하였다고 한다. 12세 때 어머니 상을 당했는데, 눈이 내리면 항상 묘소에 올라가 묘역에 쌓인 눈을 쓸어내렸고, 여름 장마철이면 또한 비를 맞으며 주변을 살펴보았다고 한다. 또한 아버지가 병환이 나면 회(膾)를 찾고 어머니가 임종 때 회를 찾았으나 제철이 아니라 찾아 드리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평생 회를 먹지 않았다고 한다. 실화(失火)로 불길이 아버지 묘소에 거의 이르자 하늘을 향하여 대성통곡을 하니 갑자기 소낙비가 내려 불이 꺼졌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조극선의 학행을 흠모한 효종은 조극선이 병들었을 때 털옷을 하사하여 덮어 주고 내의를 보내어 구료하였으며 조극선이 죽었을 때에는 호조의 낭관(郎官)으로 하여금 상사를 다스리게 하는 한편 날마다 중사(中使)[궁중에서 명을 전하는 내시]를 보내어 보살피게 하였다. 그리고 의금·관염(棺斂)을 예(禮)를 갖추어 극진히 하였으며 관곽과 분묘에 드는 비용도 모두 관(官)에서 갖추어 주게 하였을 정도였다.
추기로 조극선의 묘소가 본래 대성산에 있다가 후에 부덕산아래 통산 정향의 언덕으로 이장하고, 배위인 증정부인의 묘 또한 함께 옮겨 부장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 윤증이 찬한 비문은 곧 1680년 경신(庚申)년이고, 묘소를 천봉한 것은 조정에서 은전을 내린 뒤에 시기가 미치지 못함으로 삼가 이에 추기한다. 조극선 신도비는 조극선의 사망 후 270년 기사(己巳)월 기사(己巳)일에 세웠다고 한다.
조극선 신도비문(趙克善神道碑文)의 두전(頭篆)[비석 몸체의 머리 부분에 전자체(篆字體)로 횡서(橫書)하여 돌려가며 새겨 놓은 글]에 ‘조선국 증자헌대부 이조판서 행남대장령 증시문목공 한양 조선생 신도비명(朝鮮國贈資憲大夫吏曹判書行南臺掌令贈諡文穆公漢陽趙先生神道碑銘)’이라고 쓰여 있다. 제목(題目)은 ‘증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성균관제주 오위도총부도총관 행통훈대부 사헌부장령 증시문목공 한양 조선생 신도비명 병서(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義禁府事成均館祭酒五衛都摠府都摠管行通訓大夫司憲府掌令贈諡文穆公漢陽趙先生神道碑銘幷序)’라고 쓰여 있다. 윤증은 ‘정헌대부 전의정부찬정 겸장례원경 규장각제학 반남 박기양 근서 병전(正憲大夫前議政府贊政兼掌隷院卿奎章閣提學潘南朴箕陽謹書幷篆)’라고 찬(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