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6005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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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書院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남도 예산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홍제연 |
[정의]
충청남도 예산군에 선현 제향과 학문 연구 및 교육을 위하여 조선시대에 설립되었던 사설 교육기관.
[개설]
서원은 조선 중기 이후 사림에 의해 설립된 사설 교육기관인 동시에 향촌 자치 운영 기구이다. 조선시대 관학의 대표적인 기관이 성균관과 향교였다면 사학의 대표적인 기관은 서원이었다. 조선시대의 서원은 송대 주자(朱子)의 백록동서원을 그 전범으로 하여 설립되었으나, 기능과 성격 등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있다. 중국의 서원이 관인 양성을 위한 준비 기구로서의 학교의 성격을 고수하였다면 조선의 서원은 사림의 장수처(藏修處)이면서 동시에 향촌 사림의 취회소(聚會所)로 정치적·사회적 기구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
[서원의 성격과 역사]
서원은 관학의 교육 체계인 향교가 문란해지자 관학을 대체할 새로운 교육기관이자 사림의 강학과 장수를 위한 장소로 출현하였다. 서원은 제향과 강학의 기능을 가진 점에서는 향교와 큰 차이가 없었으나, 제향의 중심이 선현인 점, 설립의 주체가 사림이고, 설립 동기와 배경이 학문을 수양하는 곳이라는 점에서 관학인 향교와의 차이가 있었다.
조선시대 최초의 서원은 1543년(중종 38)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1495~1554]이 고려 말 학자 안향(安珦)[1243~1306]을 제향하고 유생을 가르치기 위하여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順興)에 창건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다. 후에 소수서원(紹修書院)으로 사액을 받아 사액서원의 효시가 되기도 하였다.
이후 서원은 사림계가 정치의 주도권을 쥐게 된 이후 더욱 발전하였고, 전국의 도처에 세워지면서 숙종 때에는 무려 131개소의 사액서원이 남설되기도 하였다. 또한 조선 후기가 되면 서원이 문중에 의해 건립되면서 조상 가운데 뛰어난 인물이 제향되게 되면서, 학덕보다는 충절로 이름 높은 인물들이 모시는 대상으로 중시되어 서원의 기능이 점차 변질되기 시작하였다.
서원의 기능과 역할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데, 교육의 기능·제향의 기능·향촌 사회 도서관의 기능이다. 물론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교육의 기능보다 사묘(祠廟)의 기능이 더 강조되면서 종교적 장소로서의 역할이 중시되기도 하였다.
예산 지역의 서원으로는 덕잠서원(德岑書院)과 회암서원(晦庵書院)이 존재하였으나, 대원군 때 훼철된 이후 그 터만 남아 있다.
[서원의 구조]
조선시대의 서원은 선현에게 제사를 지내고, 학문을 연구하며, 제자를 양성하는 한편 향촌을 교화하기 위해 설립한 자치 운영 기구였다. 이러한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유생들이 모여 학문하는 강학(講學) 공간과 사우(祠宇)에 선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제향(祭享) 공간을 반드시 갖추고 있었다.
서원을 구성하는 건축물은 크게 선현의 제사를 지내는 사당과, 선현의 뜻을 받들어 교육을 실시하는 강당, 원생·진사 등이 숙식하는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로 이루어져 있다. 이외에 문집이나 서적을 펴내는 장판고(藏版庫)나 책을 보관하는 서고, 제사에 필요한 제기고(祭器庫), 서원의 관리와 식사 준비 등을 담당하는 고사(庫舍), 시문을 짓고 대담을 하는 누각 등이 있었다.
[예산군의 서원]
예산군에는 덕잠서원과 회암서원이 존재하였으나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모두 훼철되어 그 터만이 남아 있다. 예산군 예산읍 향천리 금오산 동쪽 덕잠골에 소재한 덕잠서원은 김구(金絿)를 제향하는 서원으로 1703년 (숙종 29) 창건된 예산군 유일의 사액서원이었다. 회암서원은 예산군 봉산면 봉림리 436 서원골에 소재하였으며, 1709년 주자를 제향하는 서원으로 창건되었다가 대원군의 서원 훼철로 훼철되고 그 터만 남아 있다.
[덕잠서원]
덕잠서원은 1703년에 예산 유학 임주국(林柱國) 등이 상소하여, 2년 후인 1705년에 예산 출신 자암(自庵) 김구(金絿)[1488~1534]를 제향하는 서원으로 건립되었다. 1714년에 덕잠서원(德岑書院)이라는 사액을 받음으로써 예산 유일의 사액서원이 된다. 『서원등록(書院謄錄)』에 이러한 자세한 내용이 기록으로 남아 있어 그 연혁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한 위상은 순조의 장인 김조순이 덕잠서원의 원장으로 지냈고, 김조순의 아들 김좌근또한 원장을 역임한 것으로 알 수 있다. 그러나 덕잠서원은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훼철되어, 다시 지어지지 못하였다.
[회암서원]
조선시대 대흥현에 건립되었던 회암서원은 1709년(숙종 35)에 덕산 지역으로 귀양을 온 김진규(金鎭圭)[1658~1716]의 주도 아래 주자를 제향하는 서원으로 건립되었다. 회암서원의 경우 창건 후 1830년(순조 30)까지 제향 인물이 계속적으로 추가 배향되는 등 활발한 활동 모습을 보인다. 즉, 창건 후 18년 후인 1727년(영조 3) 덕산 출신의 정존재(靜存齋) 이담(李湛), 야곡(冶谷) 조극선(趙克善)을 제향하고 다시 73년이 지난 1800년(정조 27) 한산이씨 입향조인 취암(醉庵) 이흡(李洽)을 추향하였으며, 다시 30년 후인 1830년에는 대흥현감으로 부임하여 행적을 남긴 풍애(楓崖) 안민학(安敏學)을 추향하였다. 이러한 내력은 『열읍원우사적(列邑院宇事蹟)』의 정촌(靜村) 이사재(李思齋)가 지은 「서원영건기(書院營建記)」에 자세한 기록으로 남아 있다. 한편 회암서원 또한 1868년 대원군의 서원 훼철령으로 훼철된 후 터로만 남아 있다.
[평가와 의의]
예산의 서원들은 높은 위상과 더불어 예산과 관련성이 깊은 인물들을 제향하였다. 서원은 향촌 사회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공론을 일으켰으며 지역 유림들의 활동 중심지로서 역할을 담당하였다. 예산의 덕잠서원과 회암서원은 1700년대 건립이 되었는데, 건립 과정에서 예산 지역 유림들의 활발한 상소와 활동이 있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1868년과 1871년 두 차례에 걸친 서원철폐령으로 전국의 서원 중 47곳만 남게 되었고, 예산의 두 서원은 또한 그때 훼철되어 복설되지 못한 채 현재는 그 터만이 남아 있게 되었다. 두 서원의 건립 과정이나 활동 모습이 남아 있는 기록은 조선시대 예산 지역문화사 연구에 있어 귀중한 문화유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