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600600
한자 金昌祚旌閭
이칭/별칭 효자 김창조 정려
분야 종교/유교
유형 유적/건물
지역 충청남도 예산군 고덕면 몽곡양금길 141-5[몽곡리 478]
시대 근대/일제강점기
집필자 이해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927년연표보기 - 김창조 정려 건립
현 소재지 김창조 정려 - 충청남도 예산군 고덕면 몽곡양금길 141-5[몽곡리 478]지도보기
성격 정려
양식 겹처마 맞배지붕
정면 칸수 1칸
측면 칸수 1칸

[정의]

충청남도 예산군 고덕면 몽곡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효자 김창조의 일제강점기에 세운 정려.

[개설]

김창조 정려는 조선 후기의 효자 김창조(金昌祚)[1819~?]의 효행을 기려 세운 정려이다. 정려는 일제강점기인 1927년 건립되었다. 몽곡리 출신 효자 김창조는 본관이 김해(金海)이고, 초명은 김제명(金濟明), 자는 덕우(德祐)이다. 정려가 있는 예산군 고덕면 몽곡리 일대는 김해김씨 집성촌이다. 김창조는 부모가 병이 나자 똥을 맛보아 차도를 보고 한겨울에 얼음을 깨고 고기를 잡아 먹여, 부모의 병이 완쾌되었다고 한다. 또한 약을 구하기 위해 한밤중에도 험한 산길을 넘을 때가 많았는데, 김창조가 지나가면 호랑이는 산속으로 달아나고 매는 꿩을 쫓아 주었다고 한다. 부모가 등창이 났을 때에는 입으로 등창을 빨아 내고, 등창이 낫자 황달에 좋다는 짐승의 간을 구해 먹였다. 그뿐만 아니라 간병하면서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입에 넣어 주는 등 지극한 효를 행하였다. 부모가 돌아가신 후에는 3년 동안 무덤 옆에서 시묘 살았다. 사람들이 김창조의 행적을 보고 “요순이 행한 것과 같다.”라며 칭송하였다고 한다.

[위치]

김창조 정려예산군 고덕면 몽곡리 478번지 옆 골짜기에 있다.

[형태]

김창조 정려는 정면 1칸, 측면 1칸으로 겹처마에 맞배지붕 양식이다.

[현황]

김창조 정려는 아래에 방풍판을 설치해 놓았다. 콘크리트로 기단을 구성하고 위에 네모난 모양의 주춧돌을 세우고 원기둥를 올려놓았다. 정려의 4면에는 홍살을 돌렸다. 또한 주변에는 철재로 된 보호시설이 설치되어 있다. 정려의 외부 중앙 상단에는 1947년 쓴 행적기가 있다. 내부 중앙 상단에는 1927년 내려진 ‘효자 통훈대부 승문원참교 김창조지문 공부자탄강 이천사백칠십팔년 정묘 사월 일 립(孝子通訓大夫承文院參敎金昌祚之門 孔夫子誕降二千四百七十八年丁卯 四月 日 立)’이라고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의의와 평가]

김창조 정려는 명정 과정을 자세히 알 수 없다는 아쉬움이 있지만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 효자조에 김창조의 행적의 기록되어 있어 조선시대의 효행이 일제강점기에도 유효하였음을 알 수 있는 주요한 사례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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