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6006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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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方萌旌閭 |
이칭/별칭 | 효자 방맹 정려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읍 향천리 210-3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해준 |
건립 시기/일시 | 1535년 - 방맹 정려 명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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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축|증축 시기/일시 | 1773년 - 방맹 정려 이건 및 개건 |
현 소재지 | 방맹 정려 -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읍 향천리 210-3 |
원소재지 | 방맹 정려 -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읍 아리랑로 205[예산리 742-1] |
성격 | 정려각 |
양식 | 겹처마 맞배지붕 |
정면 칸수 | 1칸 |
측면 칸수 | 1칸 |
[정의]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읍 향천리에 있는 조선 후기 효자 방맹의 정려.
[개설]
방맹 정려는 방맹(方萌)[1518~1590]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서 건립된 것이다.
방맹의 본관은 온양(溫陽)이고, 고려 충렬왕 때 판도판서를 지낸 방서(方曙)[1275~?]의 21세손이다. 방맹에 대한 기록은 예산의 향리(鄕吏)였다는 것 외에 자세히 전하지는 않으나, 1617년(광해군 9)에 편찬된 『동국신속삼강행실효자도(東國新續三綱行實孝子圖)』에 효행 기록이 남아 있다. 『동국신속삼강행실효자도』에 의하면 방맹은 예산현 사람으로 어버이를 극진히 섬겼고, 아버지가 죽자 예로서 제사를 지내고 3년 동안 시묘를 하였다. 또한 몸소 찬을 만들어 제상에 올렸고, 출입할 때마다 신주에 고하였다고 한다. 방맹의 효행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어느 겨울 방맹의 아버지가 수박과 잉어가 먹고 싶다고 하자 방맹은 창호지로 온상을 만들어 수박을 재배해 아버지에게 드렸다. 또한 무한천 상류[예당저수지 제방 아래쪽] 배다리 앞 얼음 위에 꿇어앉아 밤낮으로 3일간 정성을 다해 기도하니, 꿇어앉은 자리에 구멍이 뚫리고 잉어가 튀어나왔다고 한다. 잉어를 아버지에게 먹이자 병세가 잠시 호전되었다가 돌아가셨다고 한다. 이러한 방맹의 효행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명정을 받았다고 전한다.
[위치]
예산군 예산군청에서 쌍송삼거리를 지나 공주 방면으로 800m 정도 가면 오른쪽으로 삽티공원이 있다. 효자 방맹 정려는 삽티공원 안에 있다.
[변천]
『중종실록』에는 1535년(중종 30) 3월 24일 충청도 관찰사 이수동이 예산의 향리(鄕吏) 방맹의 효행이 특이하니 포상할 것을 건의하는 기록이 있다. 현재의 정려는 1773년(영조 49) 방맹의 11세 후손 방문탁(方文鐸) 등이 주도하여 개건한 것으로 원래 예산초등학교 후문 쪽에 있었던 것을 이건한 것이다.
[형태]
방맹 정려각은 삽티공원의 서쪽 산사면에 시멘트로 기단을 조성하고 철책을 돌려 보호하고 있다. 정면 1칸, 측면 1칸의 겹처마에 맞배지붕 양식이며, 양옆에는 방풍판을 설치하였다. 익공계 가구를 한 건물로 방형 주춧돌 위에 원기둥을 세웠다. 하방 아래는 벽돌로 고맥이를 하였고, 정려의 4면은 홍살을 둘렀다. 정려의 내부 명정 현판에는 ‘효자호장방맹지문 숭정후삼계사구월 일 십일세손호장문탁여제족개건(孝子戶長方萌之門 崇禎後三癸巳九月 日 十一世孫戶長文鐸與諸族改建)’이라고 쓰여 있다. 정려기 또한 1773년 개건 때 새로 만들어 걸어 놓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정려 내부에 1773년 정려 개건을 주도한 방맹의 11세 후손 방문배(方文培)와 방문탁(方文鐸)의 것으로 보이는 비석이 남아 있다.
[의의와 평가]
방맹은 비교적 이른 시기인 중종 때 명정을 받았으나, 1773년 개건 이전의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그러므로 최초 명정 당시 정려가 있었는지, 어떠한 과정으로 명정받았는지 등에 관한 자료가 부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