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600608
한자 申皛妻密陽朴氏旌閭
이칭/별칭 신효·밀양박씨 부부 정려,신효·밀양박씨 정려
분야 종교/유교
유형 유적/건물
지역 충청남도 예산군 봉산면 대지리 산100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해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630년연표보기 - 신효·처 밀양박씨 명정
이전 시기/일시 2013년 - 신효·처 밀양박씨 정려 이전
개축|증축 시기/일시 1743년 - 신효·처 밀양박씨 정려 후손 신광신이 중수
관련 사항 시기/일시 1743년 - 신효·처 밀양박씨 정려 정려기 현판 이동윤이 씀
관련 사항 시기/일시 1885년 - 신효·처 밀양박씨 정려 명정 현판 씀
현 소재지 신효·처 밀양박씨 정려 - 충청남도 예산군 봉산면 대지리 산100 지도보기
원소재지 신효·처 밀양박씨 정려 - 충청남도 예산군 봉산면 대지리 527-2 지도보기
성격 정려
양식 맞배지붕
정면 칸수 1칸
측면 칸수 1칸

[정의]

충청남도 예산군 봉산면 대지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효자 신효와 처 밀양박씨의 정려.

[개설]

신효·처 밀양박씨 정려는 효자 신효와 그의 처 밀양박씨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이다.

신효(申皛)][1584~1660]는 예산군 봉산면 대지리에 살았던 인물로 아내 밀양박씨와 함께 어머니를 극진히 모셔 효행이 널리 알려졌다. 1630년(인조 8) 부부가 함께 명정을 받아 정려가 건립되었다. 신효는 본관이 평산(平山)이고, 자는 백이(白而)이며, 사육신 사건에 연루되어 면천(沔川)으로 유배되었던 신숙서(申叔胥)의 5대손이다. 신효는 천성적으로 효성이 지극해 어머니가 병이 들자 처 밀양박씨와 함께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여 소생시켰다고 한다.

밀양박씨는 시부모의 병세를 알아보고자 똥을 맛보기도 하였다. 또한 시부모가 병석에 오래 누워 있어 등창이 생기자 입으로 빨아내는 등 극진히 봉양하였다고 한다. 한겨울 얼음 속에서 잉어를 잡고, 오이와 애호박을 구하여 시부모에게 대접하였다. 이러한 효행이 고을에 널리 알려져 신효가 46세 되던 해 부부가 함께 명정을 받았다.

[위치]

신효·처 밀양박씨 정려예산군 봉산면 대지리에 있다. 대지리에는 정문골이라는 마을이 있다. 마을에 효자 신효의 정문이 서 있는 마을이라 정문골이라고 부른다.

[변천]

신효·처 밀양박씨 정려는 1743년(영조 19) 7대손 신광신(申光信)에 의해 중수되었다. 중수 사실은 정려 내부에 걸려 있는 정려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2013년 후손들이 정려를 대지리 527-2번지에서 현재 위치로 이전하였다.

[형태]

신효·처 밀양박씨 정려는 정면 1칸, 측면 1칸 건물로 4면에 철제 홍살이 둘러져 있다. 맞배지붕을 올렸으며 양쪽 측면에 방풍판 시설이 되어 있다. 정려 내부 상단에는 1743년 이동윤(李東允)이 쓴 ‘효자신공효부박씨 정려기(孝子申公孝婦朴氏旌閭記)’ 현판과 1885년(고종 22) 6월에 쓴 ‘효자 증통훈대부 사헌부감찰 평산신공휘효지려 효부 증숙부인 밀양박씨지려(孝子贈通訓大夫司憲府監察平山申公諱皛之閭 孝婦贈淑夫人密陽朴氏之閭)’ 명정 현판이 걸려 있다. 정려기 현판에는 신효밀양박씨의 효행 사실과 정려가 퇴락하여 7세손 신광신이 중수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정려기 현판의 크기는 가로 78㎝이고, 세로 22㎝이다. 명정 현판과 정려기 현판의 글을 그대로 옮겨 쓴 비석이 1977년 후손들에 의해 세워져 있다. 비석의 크기는 가로 32㎝, 세로 160㎝이다.

[의의와 평가]

신효·처 밀양박씨 정려는 평산신씨들의 사족 활동을 짐작할 수 있는 자료이다. 이후 후손들이 현판을 옮겨 쓴 비석을 통해 활동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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