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6006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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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趙克善趙鼎敎旌閭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충청남도 예산군 봉산면 시동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해준 |
건립 시기/일시 | 1665년 - 조극선 정려 당곡리에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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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시기/일시 | 1876년 - 조극선 정려를 이전하여 조극선·조정교 정려 건립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974년 - 조극선·조정교 정려 1차 보수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977년 - 조극선·조정교 정려 2차 보수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664년 - 조극선 명정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875년 - 조정교 명정 |
현 소재지 | 조극선·조정교 정려 - 충청남도 예산군 봉산면 시동리 |
원소재지 | 조극선 정려 - 충청남도 예산군 봉산면 당곡리 |
성격 | 정려 |
양식 | 맞배지붕 |
정면 칸수 | 2칸 |
측면 칸수 | 1칸 |
[정의]
충청남도 예산군 봉산면에 있는 효자 조극선과 조정교의 정려.
[개설]
조극선·조정교 정려는 조극선(趙克善)[1595~1658]과 조극선의 7세손 조정교(趙鼎敎)[1806~1874]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이다. 조극선은 1664년(현종 5) 명정을 받고, 조정교는 1875년(고종 12) 명정을 받았다. 조극선 정려는 원래 시동리와 이웃한 당곡리에 세워졌다. 훗날 조정교가 명정을 받자 1876년 조극선 정려를 시동리로 이건하여 한 정려각에 두 사람의 정려 현판을 걸어 놓았다.
조극선은 봉산면 시동리 입향조 조경량(趙敬良)의 현손이다. 박지계(朴知誡)·조익(趙翼)에게 사사받았는데,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1636년(인조 14) 6월 11일에 따르면 박지계의 문인 중 가장 어질다는 평을 받았으며 학문적으로도 명망이 높았다. 또한 효성이 깊어 항상 부모 모시기를 하늘과 같이 하였다. 아버지가 외출하여 집에 올 시간이 되면 항상 다리 앞까지 나와 아버지를 모시고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어느 날 조극선의 아버지가 덕산현감 이담(李湛)[1510~1575]의 집에 놀러 갔다가 밤이 깊어 비가 주룩주룩 내리자 너무 늦었다고 하며 집을 나서려 하였다. 이담은 자고 가라며 붙들었으나 조극선의 아버지는 자식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며 서둘러 나섰다. 이담이 뒤따라 가 보니 냇가에서 비를 맞으며 아버지를 기다리는 조극선의 모습을 보고 크게 감동하였다. 그래서 다리에 효교교(孝橋橋)라고 쓴 비석을 세워 주었다고 한다. 조극선은 아버지가 병이 나 회(膾)를 찾고 어머니가 임종 때 회를 찾았으나 제철이 아니라 구하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평생 회를 먹지 않았다고 한다. 실화(失火)로 불길이 아버지 묘소에 거의 이르자 하늘을 향하여 대성통곡을 하니 갑자기 소낙비가 내려 불이 꺼졌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지행(至行)과 순성(純性)이 있어 부모를 섬기되 아이 때부터 이미 부모님의 뜻을 순히 받들어 어김이 없었고, 무릇 이와 머리카락과 손톱·발톱을 모두 거두어 감춰 두면서 말하기를, “부모가 남겨 주신 몸이다.”라고 하였다. 12세에 모부인(母夫人)의 상을 당하였는데, 겨울에 눈이 오면 묘소에 가서 무덤의 눈을 깨끗이 쓸고 여름에 장마가 지면 비를 맞으면서 묘의 주변을 살펴보고는 하였다. 항상 부모를 다 모시고 있는 사람을 보면 부러워하면서 슬프게 여겼고, 『맹자(孟子)』를 읽다가 삼락장(三樂章)에 이르면 언제나 눈물을 흘렸다. 아버지 적순공(迪順公)·적순 부위(迪順副尉) 조경진(趙景璡)을 섬기기를 정성을 다하였고, 뜻과 물질[志物]을 함께 갖추어 봉양하였다. 더러 경사(京師)에서 벼슬을 하게 되면 사모하기를 어린아이와 같았고, 정월 설이나 동짓날을 만나면 새벽에 일어나서 향을 태우며 고향을 바라보고 재배하여 부모를 생각하며 사모하는 정성을 폈다.
조극선의 7세손 조정교는 자가 성삼(聖三), 호는 양심재(養心齋)이다. 조최수(趙最洙)의 아들이지만 조회수(趙會洙)의 양자가 되었다. 집안이 매우 가난하였지만 달게 여기고 여유가 있었다. 평생 비단을 가까이 하지 않고, 항상 부모의 기일이 되면, 슬퍼하기를 돌아가실 때와 같이 하였다. 또한 선산의 소나무와 오동나무를 극진히 돌보았다. 효행이 있어 죽은 이듬해인 1875년 향유(鄕儒) 동래정씨 정석조(鄭奭朝) 등이 청하여 효자 명정을 받았다. 1876년 3월 정려가 건립되었다. 배위는 동래정씨와 전주이씨로, 명정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던 정석조가 부인의 집안과 일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정교의 아들 조종명(趙鍾明) 또한 효행과 학행이 있어 급복을 받기도 하였다.
[위치]
조극선·조정교 정려는 시동리 입구에서 서쪽으로 700m 정도 들어간 곳에 남북으로 길게 내려온 능선의 구릉 하단부에 동향하여 있다.
[변천]
조극선·조정교 정려는 조극선이 1664년 먼저 명정을 받아 시동리와 이웃한 당곡리에 조극선 정려가 세워졌다. 훗날 조극선의 7세손 조정교가 1875년 효행으로 명정을 받자 1876년 조극선의 정려를 시동리로 이건하여 한 정려각에 두 사람의 정려 현판을 걸어 두었다.
조극선의 효자 명정과 관련한 자료는 따로 남아 있지 않지만, 생전 조극선의 명성을 생각할 때 도내 유생들이 대대적으로 참여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여지도서(輿地圖書)』 충청도 덕산 인물조에 의하면 1666년(현종 7) 명정을 받았다고 되어 있고, 예조에서 만든 『효행등제등록』에는 이보다 빠른 1659년(효종 10) 「효자정문질(孝子旌門秩)」에 올라 있어 기록상 차이가 있다. 명정 연대와 정려가 건립된 연대에 차이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정려 안에 있는 ‘문목공시려유래사적(文穆公施閭由來事蹟)’에 따르면 1665년 정려를 세우고, 1876년 시동리에 조정교의 정려를 건립하면서 바로 고개 넘어 당곡리에 있던 정려를 시동리로 이건하여 한 정려각에 두 사람의 정려 현판을 걸어 두었다고 한다. 1974년 1차 보수가 있었고, 1977년 2차 보수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극선의 명정 현판에 ‘숭정기원후오기사 사월일 개천(崇禎紀元後五己巳四月日改刋)’이라고 쓰여 있어 1869년 명정 현판을 고쳤음을 알 수 있다.
[형태]
조극선·조정교 정려는 정면 2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건물의 모서리에 추녀가 없고 용마루까지 측면 벽이 삼각형으로 된 지붕] 양식이다. 정려의 4면은 홍살이 돌려져 있으며 양옆 박공 아래는 방풍판이 설치되어 있다. 정려의 내부 중앙 상단에는 1869년 고친 ‘효자 야곡선생 증자헌대부 이조판서 겸지의금부사 성균관관제주 오위도총부도총관 행통훈대부 사헌부장령 증익문목공 조극선지려(孝子冶谷先生贈資憲大夫吏曹判書 兼知義禁府事成均館館祭酒五衛都摠府都摠管行通訓大夫司憲府掌令贈謚文穆公趙克善之閭)’ 명정 현판과 1875년 세워진 ‘효자 야곡선생 칠세손 학생 조정교지려(孝子冶谷先生七世孫學生趙鼎敎之閭)’라고 쓰인 명정 현판 2개가 걸려 있다. 조극선의 명정 현판 왼쪽에는 조극선의 행적을 쓴 현판이 걸려 있고, 조정교의 명정 현판 왼쪽에는 조극선의 정려 유래 사적을 쓴 현판이 걸려 있다. 오른쪽에는 조정교의 행적을 쓴 현판이 걸려 있다.
조극선의 명정 현판 아래에는 화강암으로 된 방형 대좌에 비신과 이수를 갖춘 비가 세워져 있다. 비문은 전체적으로 마모가 심하다. 판독되는 부분을 보면, ‘…남대(南臺)…조극선지려(趙克善之閭)’라는 글자가 있다. 전체 높이는 150㎝이고, 비신의 규모는 폭 50㎝, 두께 13㎝, 높이 92㎝이다.
[의의와 평가]
조극선의 아버지가 덕산현감 이담과 친분을 있어 왕래하였다는 내용을 통해 일찍부터 덕산 일대에 한양조씨의 세거지가 조성되어 있던 것으로 보인다. 조극선의 생가가 있던 곳은 현재 불무골 즉 야곡이라 불리는 시동리 골짜기이다. 조극선의 호 야곡은 지명을 따른 것이다. 골짜기로 들어가는 도로변에는 작은 개천이 흐르고 있는데 개천 위에 있던 다리가 ‘효교교’였다. 다리 옆에는 효교교라는 비석이 있었다고 하는데, 수십 년 전에 없어졌다.
조극선의 정려와 묘소가 있는 시동리의 지명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한다. 조극선이 12세 때 어머니 상을 당하여 시묘를 하였으므로, 시묫골이라 하던 것을 시묵굴 또는 시묘동, 시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시동리라고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