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6006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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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弼賢崔舜灴旌閭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충청남도 예산군 신양면 서계양배약길[서계양리]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이해준 |
건립 시기/일시 | 1875년 - 최필현·최순홍 정려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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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소재지 | 최필현·최순홍 정려 - 충청남도 예산군 신양면 서계양배약길[서계양리] |
성격 | 정려 |
양식 | 겹처마 맞배지붕 |
정면 칸수 | 2칸 |
측면 칸수 | 1칸 |
[정의]
충청남도 예산군 신양면에 있는 조선 후기의 효자 최필현과 최순홍의 정려.
[개설]
최필현·최순홍 정려는 최필현(崔弼賢)[1712~1775]과 최순홍(崔舜紅)[1737~1799]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1875년(고종 12)에 세워진 정려이다. 최필현은 경주최씨로 자는 정포(正浦)이고 숙종 때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으며 어머니를 지극한 효성으로 모셨다. 세월이 흘러 어머니가 병으로 숨을 거두려고 하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입안에 넣어 주기도 하였다. 어머니가 죽은 뒤에는 하루도 쉬지 않고 묘소를 지키며 곡하는 소리가 이경(二更)[밤 9시~11시] 때까지 들렸다고 한다. 눈물이 떨어진 곳에 기이한 풀 두 줄기가 자라 당시 사람들이 효자초(孝子草)라 불렀다. 1875년 1월 효자 명정(命旌)을 받고 동지중추부사에 증직되었다.
최순홍은 최필현의 조카로 자가 운삼(云三)이며 영조 때 사람이다. 효성이 지극하여 홀어머니가 병이 들었을 때는 어머니의 똥을 맛보고,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이며 정성을 다해 병간호를 하였다. 어머니가 죽은 뒤 3년간 시묘살이를 하다가 자신도 병에 걸렸다고 전한다. 효행으로 숙부 최필현과 함께 1875년 봄 효자 명정과 약을 하사받고 가선대부에 증직되었다.
[위치]
예산군 신양면 소재지에서 대흥 쪽으로 난 지방도616호선을 따라 1㎞ 정도 가서 북쪽으로 다시 1㎞ 가면 서계양리 배약동마을이 나온다. 최필현·최순홍 정려는 배약동마을 입구에 계좌정향(癸坐丁向)으로 세워져 있다.
[형태]
최필현·최순홍 정려는 정면 2칸, 측면 1칸의 익공식 건물로 겹처마에 맞배지붕 양식이다. 양옆의 박공 아래에는 방풍판을 설치하였다. 4면의 아랫부분은 고맥이를 하였고, 정면과 좌우면에 홍살을 돌렸다. 내부 중앙 상단에는 ‘효자 학생 최필현지문(孝子學生崔弼賢之門)’, ‘효자 학생 최순홍지문(孝子學生崔舜灴之門)’이라고 쓴 두 개의 명정 현판이 나란히 걸려 있다. 뒷면 벽의 왼쪽 상단에는 1875년 8월 대사헌(大司憲) 서하(西河) 임헌회(任憲晦)가 지은 정려기와 1919년 지은 포창완의문(襃彰完議文)이 걸려 있다. 정려 왼쪽에는 ‘자헌대부 칠세손 영환효정(資憲大夫七世孫榮煥孝旌)’이라고 적힌 최영환의 현판과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김정기(金鼎基)가 찬한 정려기후서(旌閭記後序)가 걸려 있다.
[현황]
최필현·최순홍 정려는 배약동마을 입구에 있으며 정려 주변으로 철제 울타리가 설치되어 있다. 정려 앞에는 1996년 세운 최필현의 7세손 운암(雲庵) 최영환(崔榮煥)[1870~?]의 효자비와 최필현과 최순홍의 효행에 대해 설명하는 철제 안내문이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