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조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600673
한자 楊州趙氏
영어공식명칭 Yangju Jo Clan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
지역 충청남도 예산군 신양면 신양리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고순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본관 양주 - 경기도 양주시
입향지 양주조씨 입향지 - 충청남도 예산군 신양면 신양리 지도보기
성씨 시조 조잠(趙岑)
입향 시조 조충수(趙忠秀)

[정의]

조잠을 시조로 하고 조충수를 입향조로 하는 충청남도 예산의 세거 성씨.

[연원]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따르면 양주조씨(楊州趙氏) 시조는 조잠(趙岑)[?~?]으로, 고려 때 양주의 호장이었으며 판중추원사에 증직된 인물이다.

양주조씨는 조선 초 조잠의 증손자 대부터 평공파(靖平公派)·문강공파(文剛公派)·제학공파(提學公派)·강화공파(江華公派)로 분파되었다. 이 중 문강공 조말생의 후손인 조충수(趙忠秀)[?~?]가 예산에 입향하였으며 아들인 조정(趙挺)[1551~1628]에 이르러 가문이 크게 번성하였다.

예산의 양주조씨는 많은 인물들을 배출하였다.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는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조정의 자는 여호(汝豪), 호는 죽천(竹泉)·한수(漢璟)이다. 조충수의 아들로 신양면 죽천리에 거주하였다. 선조 대에 문과 급제 후 광해군 때 벼슬이 우의정에 올랐다. 묘소는 신양면 신양리에 있다.

조진은 조정과 형제로 벼슬이 공조판서, 판중추부사에 올랐다. 이황의 문인으로 예제(禮制)를 만들기도 하였다. 묘소는 신양면 신양리에 있다.

조익강(趙益剛)은 1675년(숙종 1) 문과 급제 후 청소부사, 통례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청송에 선정비가 있으며 묘는 신양면에 있다.

조기석(趙祺錫)은 조익강의 아들로 신양에서 거주하였으며 1690년(숙종 16) 문과 급제 후 강릉부사를 역임하였다. 묘는 신양면에 있다.

조사석(趙師錫)의 자는 공거(公擧), 호는 만회(晩悔),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1662년(현종 3) 문과 급제 후 좌의정까지 올랐다. 묘는 대흥면 갈신리에 있다.

조태구(趙泰耉)의 자는 덕수(德璟), 호는 소헌(素軒)·하곡(霞谷)이다. 조사석의 아들이다. 벼슬이 우의정까지 올랐으며 소론의 영수였다.

조두순(趙斗淳)의 자는 원칠(元七), 호는 심암(心菴),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영의정을 역임하였다. 조두순이 살았다고 전하는 이한직 가옥과 조두순이 쓴 남연군비가 예산군에 있다.

[입향 경위]

1750년(영조 26) 이후에 편찬된 것으로 보이는 『대흥군읍지』와 1871년에 제작된 『호서읍지』의 대흥 성씨 조에 양주조씨가 등장한다. 대흥 지역에서 양주조씨의 세력이 상당히 번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양주조씨 문강공파가 예산의 대흥군과 관계를 맺게 된 것은 조충수가 말년에 예산군 신양면 신양리에 은거하면서부터이다. 특히 조충수의 맏아들 조정은 벼슬이 우의정에 올랐고 둘째 아들인 조진(趙振)[1535~?]은 공조판서에 이르렀는데, 이때부터 대흥 지역뿐만 아니라 조정에서도 세력을 크게 떨치기 시작하였다. 이후 신양리뿐만 아니라 대흥 지역 전역으로 후손들이 이거하기 시작하였다.

[현황]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15년 현재 예산군에는 202명의 양주조씨가 살고 있는데, 대부분 신양면대흥면 지역에 분포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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