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6006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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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昌寧成氏 |
영어공식명칭 | Changnyeong Seong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충청남도 예산군 신양면 귀곡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고순영 |
입향조 생년 시기/일시 | 1555년 - 성흔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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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향조 몰년 시기/일시 | 1626년 - 성흔 사망 |
입향 시기/일시 | 1613년 - 창녕성씨 입향조 성흔 예산 입향 |
본관 | 창녕 - 경상남도 창녕군 |
입향지 | 창녕성씨 예산 입향지 - 충청남도 예산군 신양면 귀곡리 |
세거|집성지 | 창녕성씨 예산 세거지 - 충청남도 예산군 신양면 귀곡리 |
성씨 시조 | 성인보(成仁輔) |
입향 시조 | 성흔(成炘) |
[정의]
성인보를 시조로 하고 성흔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남도 예산의 세거 성씨.
[연원]
창녕성씨(昌寧成氏)의 시조는 고려 때 호장중윤을 역임했던 성인보(成仁輔)이다. 호장부정을 지낸 성숙창(成淑昌)의 아들이다. 당나라의 학사 성경(成鏡)이 우리나라에 건너와서 정착하였는데, 성경의 후손이 번성하여 창녕을 관향으로 삼았다고 한다. 창녕성씨는 고려 때 성공필(成公弼)과 성한필(成漢弼) 대에서 두 계통으로 갈라졌으며, 지금은 13파로 분파되어 있다.
예산 지역 창녕성씨 문중이 배출한 인물로는 중종반정 공신 성희안과 삼괴당 성흔, 부호군 성응우(成應祐), 옥당 성간(成侃), 현감 성영문(成永文), 대장 성익, 수사 성교수(成喬修), 대사간 성정진(成鼎鎭), 우윤(右尹) 성석신(成碩藎), 부사 성혁수(成赫壽), 군수 성윤적(成胤績), 판서 성원묵(成原黙), 판서 성수묵(成遂黙), 참판 성건호(成健鎬), 효자 성한익(成漢翼), 효자 성운익(成雲翼), 현감 성재선(成載璿), 현감 성한(成炘), 효자 성래기(成來基), 독립운동가 성재한(成載翰), 효자 성일환(成佾煥) 등이 있다.
[입향 경위]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가 일어나 정국이 혼란해지자 성흔(成炘)[1555~1626]은 벼슬을 버리고 양주를 거쳐 대흥군 원동면 가좌울[현 예산군 신양면 귀곡리]로 낙향하였다. 대흥군 원동면 가좌울은 성흔의 증조할아버지인 성희옹(成希雍)[1464~1526]의 아내 담양전씨(潭陽田氏)의 고향이다. 성흔의 낙향 당시 김포 고촌 개화산에 있던 성희옹의 묘를 이전하고 불천위 신주까지 모셔왔다. 귀곡리에 정착한 성흔은 모든 재앙을 추방하고 덕을 심는다는 뜻으로 집 주위와 마을 입구에 느티나무를 심고 삼괴당(三槐堂)이라 칭하였으며 학문과 서예에 전념하였다.
[현황]
2001년 현재 예산 지역 창녕성씨는 신양면 귀곡리[184가구], 예산읍 예산리와 관작리, 그리고 고덕면 상장리에 거주하고 있다.
2015년 현재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예산군에는 631명의 창녕성씨가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관련 유적]
예산군 신양면 귀곡리에 삼괴당 성흔의 묘소가 있다. 1626년(인조 4)에 사망한 성흔은 생전의 뜻대로 증조할아버지인 성희옹 부조묘 뒤 옥녀봉 아래 산 중턱에 묻혔고 1631년에 비석을 세웠다.
성희옹사는 중종반정 당시 정국공신 3등에 봉해진 성희옹의 사당이며, 예산군 신양면 귀곡리에 있다. 원래 김포 고촌면 개화산에 있었지만 처가인 예산군 신양면 귀곡리로 옮겨졌고 1990년에 대대적으로 보수하여 정비되었다. 사우 뒤편 남측에 창녕성씨 묘역이 조성되어 있고 상단부에 성희옹 묘소가 있다.
신양면 귀곡리에 있는 진주강씨·양주조씨 열녀비는 성흔(成炘)의 아내 양주조씨와 성응기의 아내 진주강씨의 열행을 기리고자 1811년(순조 11)에 세운 열녀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