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6007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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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履喬 |
영어공식명칭 | Kim Ikyp |
이칭/별칭 | 공세(公世),죽리(竹里),문정(文貞)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예산군 신양면 죽천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고순영 |
출생 시기/일시 | 1764년 - 김이교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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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789년 - 김이교 식년문과 병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800년 - 김이교 함경북도 명천에 유배 |
활동 시기/일시 | 1806년 - 김이교 귀양에서 풀려나 동부승지로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810년 - 김이교 일본통사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811년 - 김이교 통신사로서 대마도부중으로 건너가 국서전명 거행 |
활동 시기/일시 | 1812년 - 김이교 통신사로서 대마도에 국서 전달 |
활동 시기/일시 | 1831년 - 김이교 우의정 임명 |
몰년 시기/일시 | 1832년 - 김이교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836년 - 김이교 순조묘정에 배향 |
부임|활동지 | 김이교 부임지 - 강원도 원주시 |
부임|활동지 | 김이교 부임지 - 평양직할시 |
부임|활동지 | 김이교 활동지 - 일본 대마도 |
유배|이배지 | 김이교 유배지 - 함경북도 명천군 |
묘소|단소 | 김이교 묘소 - 충청남도 예산군 신양면 죽천리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안동(安東) |
대표 관직 | 우의정 |
[정의]
충청남도 예산군 신양면 죽천리에 묘소가 있는 조선 후기의 문신.
[개설]
김이교(金履喬)[1764~1832]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1789년(정조 13)부터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1810년(순조 10)부터 일본통사로 활동하였으며, 1811년부터 조선의 마지막 통신사로 대마도에 가서 임금의 국서를 전달하는 일을 수행하였다. 이후 우의정에 이르렀으며, 1836년(헌종 2) 순조묘정에 배향되었다.
[가계]
김이교의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자는 공세(公世), 호는 죽리(竹里),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할아버지는 대사간 김시찬(金時粲)이고, 아버지는 관찰사 김방행(金方行)이며, 어머니는 심황(沈鐄)의 딸이다.
[활동 사항]
김이교는 1789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 수찬, 초계문신, 북평사 등을 거쳐 1800년(정조 24) 겸문학이 되었다. 1800년 정조가 죽자 순조가 6월 즉위하고 대왕대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노론 벽파가 정권을 잡고 시파를 탄압하였다. 이때 시파이던 김이교는 함경북도 명천에 유배당했다. 1806년 귀양에서 풀려나 동부승지가 되고 이조참의, 강원도관찰사가 되었다.
김이교는 1810년 일본통사에 임명되었다. 1811년 2월 12일 출발하여 5월 22일 부사 이면구와 함께 대마도부중의 객관에서 동무상사 미나모토(原忠岡)와 부사 후지야스(藤安薰)에게 국서전명을 거행하고 외교상의 예물 명단을 전달하였다. 이듬해에도 대마도에 건너가서 국서를 전달하였다.
그 뒤 김이교는 성균관대사성, 사헌부대사성, 도승지, 한성부판윤 등을 거쳐 이조판서, 평안도관찰사, 병조판서, 형조판서, 공조판서, 예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831년(순조 31) 우의정에 올랐는데 이때 영의정과 우의정이 모두 공석 중이었으므로 국정을 도맡아 수행하였다. 1832년(순조 32)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김이교의 저서로는 『죽리집(竹里集)』이 있다.
[묘소]
김이교의 묘소는 예산군 신양면 죽천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