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6007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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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都膺 |
이칭/별칭 | 도유(都兪),자예(子藝),청송당(靑松堂)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예산군 응봉면 지석리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조민희 |
활동 시기/일시 | 1392년 - 도응 조선 건국 시기 홍주 노은동에 은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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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 시기/일시 | 1808년 - 도응 운천서원, 경현사, 두문동서원에 배향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81년 - 도응 유물 보물 제724호로 지정 |
묘소|단소 | 도응선생묘 일원 - 충청남도 예산군 응봉면 계정길 9-20[지석리 산141-16] |
사당|배향지 | 경충제 - 충청남도 예산군 응봉면 지석리 |
성격 | 문신|충신 |
성별 | 남 |
본관 | 성주(星州) |
대표 관직 | 찬성사 |
[정의]
충청남도 예산에 묘가 있는 고려 말의 충신.
[개설]
도응(都膺)[?~?]은 고려 말의 충신으로, 두문동 72현 중 한 사람이다.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죽마고우였다고 한다.
[가계]
도응의 본관은 성주(星州), 초명은 도유(都兪), 자는 자예(子藝), 호는 청송당(靑松堂)이다. 예산 지역 성주도씨(星州都氏) 입향조이다.
[활동 사항]
도응은 고려 우왕 때 과거에 급제하여, 고려 말에 찬성사를 지내다가, 1392년(태조 1)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자 불사이군의 절의를 지켜 벼슬을 버리고 홍주 노은동[현 충청남도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에 은거하였다. 이후 친구와의 옛 정을 생각한 태조 이성계가 상장군에 임명하고 다섯 번이나 조정으로 불렀으나 모두 거절하였다고 한다.
[학문과 저술]
도응은 문장에 능하였다고 전하며, 「어사시(御賜詩)」 1수, 「두문동비표(杜門洞碑表)」 14자, 「사제문(賜祭文)」과 「부조현연구(不朝峴聯句)」가 각 1편씩 남아 있다.
[묘소]
도응의 묘소는 예산군 응봉면 계정길 9-20[지석리 산141-16]에 있다. ‘도응선생묘 일원(都膺先生墓一圓)’이라는 명칭으로 충청남도 기념물 제90호로 지정되었으며, 후손들이 사당인 경충제(敬忠齊)를 지어 도응의 제사를 모시고 있다.
[상훈과 추모]
도응은 1808년(순조 8) 성주 운천서원(雲川書院)과 장성 경현사(景賢詞), 개성 두문동서원(杜門洞書院)에 배향되었다. 조선 건국 이후 태조가 1393년(태조 2)부터 1397년까지 도응에게 하사한 사령왕지 4매와 녹패 등 5매의 고문서가 일괄 보물 제724호[성주도씨 종중 문서 일괄 ]로 지정되어 있다. 이 문서들을 통해 조선 개국 초 도응과 태조의 관계를 알 수 있으며, 조선 전기 관제의 변천 과정, 새보[국왕의 도장]의 사용 경위, 그리고 서체나 고문서의 양식 등을 연구하는 데도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