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6007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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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愈 |
이칭/별칭 | 박유(朴悠),유은(柳隱)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예산군 광시면 은사리 |
시대 |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조민희 |
활동 시기/일시 | 1275년 - 박유 대부경 재임 시 첩제 주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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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단소 | 박유 묘소 - 충청남도 예산군 광시면 광시리 |
성격 | 관인 |
성별 | 남 |
본관 | 울산(蔚山) |
대표 관직 | 대부경 |
[정의]
예산에 은거한 고려 후기의 문신.
[개설]
박유(朴愈)[?~?]는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고려에 망하자 은거하며 조선에서는 벼슬을 하지 않았다.
[가계]
박유의 본관은 울산(蔚山)이며, 초명은 박유(朴悠), 호는 유은(柳隱)이다. 아버지는 박길우(朴吉佑)이며, 부사 박규세(朴奎世)의 후손이다.
[활동 사항]
박유는 1275년(충렬왕 1)에 대부경으로 있으면서 당시 고려의 처녀들이 공녀로서 원나라에 보내지는 데 반발하여 첩제(妾制)의 수용을 건의하였다. 박유의 주장은 관리의 직위에 따라 첩의 수에 차등을 두고, 첩의 소생도 벼슬할 수 있도록 하여 인구를 늘리고 공녀를 줄이자는 것이었는데, 재상 부인들의 반대가 심하여 논의가 중지되었다. 박유는 이후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임존[현 예산군 대흥면]으로 들어가 은거하였다.
[묘소]
박유의 묘소는 예산군 광시면 광시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