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6007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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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辛啓榮 |
영어공식명칭 | Shin Kyeyoung |
이칭/별칭 | 영길(英吉),선석(仙石),정헌(靖憲)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예산군 대술면 송석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고순영 |
출생 시기/일시 | 1577년 - 신계영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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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01년 - 신계영 사마시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603년 - 신계영 낙향 |
활동 시기/일시 | 1619년 - 신계영 알성문과 병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619년 - 신계영 병조좌랑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624년 - 신계영 조선통신사 종사관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634년 - 신계영 동부승지 승진 |
활동 시기/일시 | 1637년 - 신계영 속환사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652년 - 신계영 사은부사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655년 - 신계영 사직 및 낙향 |
몰년 시기/일시 | 1669년 - 신계영 사망 |
출생지 | 신계영 출생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
거주|이주지 | 신계영 이주지 -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오산리 |
묘소|단소 | 신계영 묘소 - 충청남도 예산군 대술면 송석리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영산(靈山) |
대표 관직 | 동부승지 |
[정의]
조선 후기 충청남도 예산에서 활동한 문신.
[개설]
신계영(辛啓榮)[1577~1669]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벼슬이 동부승지에 이르렀다. 문인으로서 예산의 정경과 생활을 노래한 가사 「월선헌 십육경가」를 지었다.
[가계]
신계영의 본관은 영산(靈山)이며 자는 영길(英吉), 호는 선석(仙石), 시호는 정헌(靖憲)이다. 아버지는 호조좌랑을 지낸 신종원(辛宗遠)이며, 어머니는 남양홍씨(南陽洪氏)이다.
[활동 사항]
신계영은 1577년(숙종 40) 서울 낙산에서 태어났다. 1601년(선조 34)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1603년 예산군 신암면으로 낙향하였다. 신계영은 낙향한 뒤 학문에 전념하면서 부모를 봉양하며 살다가 1619년(광해군 11) 다시 문과에 응시하여 급제하고 병조좌랑에 임명되었다.
1624년(인조 2) 통신사(通信使)로 일본에 가 임진왜란 당시 포로로 끌려갔던 조선인 146명을 구해 왔다. 1634년 동부승지가 된 후, 1637년에는 속환사(贖還使)로서 청나라로 가 병자호란 때 잡혀갔던 포로 600여 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2년 뒤인 1639년에는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던 소현세자를 맞이하는 부빈객으로, 1652년(효종 3)에는 사은부사로 청나라 심양에 다녀왔다.
신계영은 지방관으로서는 나주목사, 강화유수 등을 거쳐 전주부윤에 이르렀다. 1655년 관직을 사임하고 예산으로 돌아온 후 문인으로서 여유로운 말년을 보내며, 문학 작품을 다수 남겼다. 조정을 떠난 후인 1665년(현종 6)에 지중추부사 직을 받아 원로 문신을 예우하기 위해 설치된 기로소의 일원이 되었다. 1669년(현종 10)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신계영의 저서로는 『선석유고(仙石遺稿)』가 있으며, 『선석유고』에 수록된 시조 「연군가(戀君歌)」·「탄로가(歎老歌)」·「전원사시(轉園四時歌)」가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월선헌 십육경가」는 1655년 벼슬에서 물러나 예산으로 내려온 후 같은 해 10월에 지은 가사로, 신계영이 자신의 거처 월선헌에서 누린 예산의 사계절 모습을 아름답게 그려 낸 작품이다.
[묘소]
신계영의 묘소는 예산군 대술면 송석리에 있으며, 대술면에서 아산시로 가는 길가 산 아래에 신도비가 있다.
[상훈과 추모]
신계영은 1665년 기로소에 들어갔으며, 1667년 현종으로부터 특별히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