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6007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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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慶全 |
이칭/별칭 | 중집(仲集),석루(石樓)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예산군 대술면 방산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고순영 |
[정의]
충청남도 예산에 문집 목판본이 보관되어 있는 조선 후기의 문신.
[개설]
이경전(李慶全)[1567~1644]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전라도관찰사, 형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숭록대부에 올랐다. 문집인 『석루유고(石樓遺稿)』 목판본이 예산군 대술면 방산리에 있는 아버지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사당에 소장되어 있다.
[가계]
이경전의 본관은 한산(韓山)이며 자는 중집(仲集), 호는 석루(石樓)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이치(李穉)이고, 할아버지는 내자시정(內資寺正)을 지낸 한천부원군(韓川府院君) 이지번(李之蕃)이다. 아버지는 선조 때 재상을 지낸 이산해이고, 어머니는 조언수(趙彦秀)의 딸 양주조씨(楊州趙氏)이다.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이 매부이다.
[활동 사항]
이경전은 1590년(선조 23) 중광과에 급제하고 이듬해 독서당에 들었으며, 1595년 한성참군을 거쳐 1596년 예조좌랑과 병조좌랑을 역임하였다. 1608년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던 소북파 유영경(柳永慶)의 탄핵을 이끌다가 정인홍(鄭仁弘) 등과 함께 파직되어 강계로 유배되었으나 같은 해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풀려났다. 1612년(광해군 4)에 충홍도관찰사(忠洪道觀察使)로 부임하였다. 1614년 전라도관찰사를 역임하고 1615년 형조판서에 올랐으며, 1618년 한평군에 봉해지고 좌참찬이 되었다.
1623년(인조 원년) 인조의 정식 책봉을 요청하기 위해 명나라로 가는 주청사로 임명되었다. 1628년 정묘호란 때 강화도까지 인조를 호종한 공을 인정받아 숭록대부로 승진하였다. 이후 1636년에 기로소에 들어갔으나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일흔의 나이로 인조를 모시고 남한산성으로 피난했다. 1637년 장유(張維)·이경석(李景奭) 등과 함께 삼전도(三田渡)의 비문을 작성하라는 명을 받았으나, 병을 핑계로 거절하였다. 1638년 다시 형조판서에 올랐으나 1640년 사직하였다.
[학문과 저술]
이경전은 당대에 문필로 명성이 높았으며, 저서로는 『석루유고』가 있다.
[묘소]
이경전의 묘소는 충청남도 보령시 주교면 고정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