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600740 |
---|---|
한자 | 鄭晩錫 |
이칭/별칭 | 성보(成甫),과재(過齋),숙헌(肅獻)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예산군 광시면 신흥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고순영 |
출생 시기/일시 | 1758년 - 정만석 출생 |
---|---|
활동 시기/일시 | 1783년 - 정만석 생원시 합격 |
활동 시기/일시 | 1783년 - 정만석 증광문과 병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785년 - 정만석 성균관전적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785년 - 정만석 병조참의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794년 - 정만석 지평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801년 - 정만석 하정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 파견 |
활동 시기/일시 | 1807년 - 정만석 충청도관찰사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815년 - 정만석 한성부판윤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819년 - 정만석 동지정사로 청나라에 파견 |
활동 시기/일시 | 1829년 - 정만석 우의정 역임 |
몰년 시기/일시 | 1834년 - 정만석 사망 |
출생지 | 정만석 출생지 - 충청남도 예산군 광시면 신흥리 |
묘소|단소 | 정만석 묘소 - 경기도 포천군 가산면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온양(溫陽) |
대표 관직 | 충청도관찰사|우의정 |
[정의]
조선 후기 예산 출신의 문신.
[개설]
정만석(鄭晩錫)[1758~1834]은 조선 후기의 예산 출신 문신으로, 충청도관찰사를 거쳐 벼슬이 우의정에 이르렀다.
[가계]
정만석의 본관은 온양(溫陽)이며 자는 성보(成甫), 호는 과재(過齋), 시호는 숙헌(肅獻)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정하경(鄭夏卿)이고 할아버지는 정유신(鄭維新)이다. 아버지는 지중추부사 정기안(鄭基安)이며, 어머니는 김상정(金相鼎)의 딸 안산김씨(安山金氏)이다.
[활동 사항]
정만석은 1758년(영조 34) 지금의 예산군 광시면 신흥리에서 태어났다. 1783년(정조 7) 생원시에 합격하고 1783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85년 성균관전적·병조참의를 거쳐 1794년 지평이 되었으며 11월에 양근·가평어사가 된 뒤 호남·호서 암행어사로 나가 명성을 떨쳤다. 1798년 영일현감으로 외직에 나갔다가 1801년(순조 1) 교리를 거쳐 하정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파견되었다.
정만석은 1803년 동래부사 재임 시 뇌물을 받고 대마도와의 통신서계를 위조한 역관을 처벌하였으며, 1807년 충청도관찰사로 부임하였다. 1811년 평안도에서 홍경래의 난이 발생하자 민심 수습을 위해 관서위무사로 파견되었으나 호포 징수상의 문제와 논공행상의 불철저로 일시 파직되었다가 곧 평안감사가 되었다. 1815년 한성부판윤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호조판서를 거쳐 1819년 동지정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광주부유수로 나갔다가 다시 경직으로 돌아와 요직을 역임했고, 1829년 우의정이 되었다. 1834년(헌종 즉위년)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정만석의 저서로는 『관서신미록(關西辛未錄)』이 전한다. 『관서신미록』은 정만석이 평안감사로 있을 당시 홍경래의 난과 관련한 죄인의 문초 기록을 임금에게 올린 것으로, 홍경래의 난 연구의 주요 자료 중 하나이다.
[묘소]
정만석의 묘소는 경기도 포천군 가산면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