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6007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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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趙復陽 |
이칭/별칭 | 중초(仲初),송곡(松谷),문간(文簡)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예산군 신양면 신양리 백석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고순영 |
출생 시기/일시 | 1609년 - 조복양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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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38년 - 조복양 정시 문과 병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649년 - 조복양 부교리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53년 - 조복양 부교리·이조정랑·집의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657년 - 조복양 시강관으로 근무 |
활동 시기/일시 | 1659년 - 조복양 이조참의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60년 - 조복양 진휼청당상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68년 - 조복양 예조판서와 대제학 제수 |
몰년 시기/일시 | 1671년 - 조복양 사망 |
묘소|단소 | 조복양 묘소 - 충청남도 예산군 신양면 신양리 |
사당|배향지 | 명고서원 - 경기도 화성시 매송면 원리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풍양(豐壤) |
대표 관직 | 대제학|예조판서 |
[정의]
충청남도 예산에 묘소가 있는 조선 후기의 문신.
[개설]
조복양(趙復陽)[1609~1671]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대제학·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가계]
조복양의 본관은 풍양(豐壤)이며 자는 중초(仲初), 호는 송곡(松谷),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의빈부도사 조간(趙侃), 할아버지는 지중추부사 조영중(趙瑩中)이다. 아버지는 좌의정 조익(趙翼)이며, 어머니는 병조참판에 추증된 현덕량(玄德良)의 딸 성주현씨(星州玄氏)이다.
[활동 사항]
조복양은 1633년(인조 11)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638년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검열을 거쳐 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1641년 정언을 지냈으며, 잠시 체직되었다가 헌납·교리·지평을 거쳐 부교리가 되었다. 1651년(효종 2) 아버지 조익이 쓴 윤방(尹昉)의 시장 문제로 의금부에 감금되었다가 풀려난 뒤 관직에서 물러났다. 1653년 헌납으로 복직된 뒤, 부교리·이조정랑을 역임하고 집의가 되었으나, 이후에도 계속해서 파직과 복직을 반복하다가 겸보덕으로 돌아와 집의·겸필선·사간·응교를 역임하였다. 1657년 시강관으로 재임 중 궁중음악의 타락을 지적하며 고악을 본받아 시정할 것을 주장하였고, 「악장옥책교문(樂章玉冊敎文)」을 지었다.
조복양은 1660년(현종 1) 대사성이 되었고, 이듬해에는 대사간으로서 별도로 설치된 진휼청당상이 되어 흉년으로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는 데에 힘썼다. 그 뒤 부제학·예조참판·병조참판·동지성균관사·강화유수·대사성을 지낸 뒤 원자(元子)의 보양관이 되었다. 1668년에는 예조판서로 대제학을 겸하여 정시를 총괄했으나, 같은 과거 시제를 거듭 출제하는 실수를 저질러 이듬해에 파직되었다가 곧 형조판서로 복직하였다. 그 뒤 우참찬·대제학·이조판서·예조판서를 역임하고 1671년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조복양의 저서로는 시문집인 『송곡집(松谷集)』이 있다. 『송곡집』은 1705년(숙종 31) 아들 조지겸과 조카 조지항·조지정 등이 편집·간행하였다. 총 12권 6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권두에 최석정(崔錫鼎)의 서문이 있고, 발문은 없다. 책은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으며, 판각은 공주 마곡사 고방에 보관되어 있다. 판각은 조익의 『포저유서(浦渚遺書)』 판각과 함께 「포저유서 및 송곡문집 판각」으로 명명되어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26호로 지정되어 있다.
[묘소]
조복양의 묘소는 예산군 신양면 신양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조복양은 사망한 후 경기도 화성시 매송면 원리에 있었던 명고서원(明皐書院)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