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6007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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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安敏學 |
이칭/별칭 | 습지(習之),이습(而習),풍애(楓厓),문정(文靖)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
시대 |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조민희 |
출생 시기/일시 | 1542년 - 안민학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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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80년 - 안민학 희릉참봉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580년 - 안민학 아산현감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583년 - 안민학 사헌부감찰 제수 |
몰년 시기/일시 | 1601년 - 안민학 사망 |
출생지 | 안민학 출생지 - 서울특별시 |
사당|배향지 | 회암서원 -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광주(廣州) |
대표 관직 | 사헌부감찰|소모사 |
[정의]
조선 전기 대흥현감을 지낸 문신.
[개설]
안민학(安敏學)[1542~1601]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필법이 뛰어났으며 문장에도 능하여 사림의 존경을 받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소모사(召募使)가 되어 군량의 수송을 맡았다.
[가계]
안민학의 본관은 광주(廣州)이며 자는 습지(習之)·이습(而習), 호는 풍애(楓厓),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아버지는 찰방 안담(安曇)이다.
[활동 사항]
안민학은 1542년(중종 37) 한성[현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났다.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경(經)·사(史)·백가(百家)를 널리 섭렵하였다. 25세에 박순(朴淳)에게 나아가 사제 관계를 맺은 뒤, 이이(李珥)·정철(鄭澈)·이지함(李之菡)·성혼(成渾)·고경명(高敬命) 등과 교유하였다. 1561년(명종 16) 학행으로 천거를 받아 원릉참봉(元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580년(선조 13) 이이의 추천으로 희릉참봉(禧陵參奉)이 되었으며, 1583년 사헌부감찰이 되었다. 이후 외직으로 나아가 대흥·아산·현풍·태인 등지의 현감을 두루 거치고 전주의 별서에 우거하던 중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소모사에 임명되었다.
안민학은 소모사로서 전라도 광주를 중심으로 군량 수천 석, 군마 수백 필, 군사 수천 명을 모아 북상하여 아산에 이르렀으나, 병을 얻어 나아가지 못하자 조정에서는 병력과 군량을 체찰사 유성룡(柳成龍)에게 돌리게 하였다. 안민학은 이때의 공로로 사도시첨정(司䆃寺僉正)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홍주의 신평(新平)에 돌아가서 지내다 1601년 6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안민학의 저서로는 2권 1책의 『풍애집(楓崖集)』이 있다. 1738년(영조 14) 후손 안세광(安世光)이 편집·간행하였다. 『풍애집』은 권1에 시 91수가 실려 있으며, 권2에 기(記) 1편, 서(書) 2편, 제문 5편, 잡저 4편, 부록으로 세계원류·연보·풍애선생비문·풍애선생행장·부시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는 대체로 자연시가 많으나, 우국충정과 군왕을 사모하는 시도 간혹 섞여 있다. 서 중 「여홍주목사서(與洪州牧使書)」는 임진왜란으로 피폐된 홍주목 관내의 신평현(新坪縣) 백성들에 대하여 부세의 탕감과 요역의 면제를 요청하는 서한이다. 제문은 정철·이지함·성혼 등 명사에 관한 것이다. 잡저의 「심학론(心學論)」에서는 학문과 마음의 관계, 인심의 본질, 마음의 체용(體用) 등에 대하여 설명하였고, 「하도낙서설(河圖洛書說)」·「근사록설문(近思錄設問)」·「대학서절해(大學序節解)」 등에서도 조목으로 나누어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다.
[상훈과 추모]
안민학은 사망한 후 제학(提學)에 추증되었으며, 이후 증통정대부 이조참의에 증직되고 덕산 회암서원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