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6007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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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文人學者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남도 예산군 |
시대 | 고려/고려 전기,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해준 |
[정의]
충청남도 예산군을 대표하는 저명한 문인·학자로서 업적과 기록, 유적 등을 남긴 인물.
[개설]
예산군은 많은 문인과 학자를 배출하였는데, 자암(自庵) 김구(金絿)[1488~1534]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는 대표적인 학자이자 서예가이고,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로 유명한 현상벽(玄尙璧)·한홍조(韓弘祚)[1681~1712]·윤봉구(尹鳳九)[1683~1767] 등의 성리학자도 예산이 배출한 문인·학자이다. 성호(星湖) 이익(李瀷)[1681~1763]의 학맥을 이은 이용휴(李用休)[1708~1782], 이가환(李家煥)[1742~1801] 등은 실학자로서 예산의 명성을 높인 대표적 인물이다.
[고려시대의 문인]
예산군에서 기록상 가장 먼저 확인되는 인물은 『고려사열전』과 『대흥현지』 인물 조에 기록된 한문준(韓文俊)[?~1190]이다. 문헌에 따르면 한문준은 대흥군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글을 잘 지었으며 70세에 관직에서 물러나 은거하였으나 날마다 은사와 시객이 찾아와 어울렸다고 전한다. 한문준의 아버지 한유충(韓惟忠)[1080~1146]은 대흥한씨(大興韓氏)의 시조이기도 하다.
[조선 전기의 문인·학자]
조선 전기의 예산군 인물로는 자암 김구를 빼놓을 수 없다. 김구는 어려서부터 성실하고 문재가 뛰어났으며 김굉필(金宏弼)[1454~1504]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김구의 학문은 도학을 주로 하는 경학의 연구가 극에 달했고 시문에도 능숙하였다. 또한, 음률에도 능통해 중종이 악정(樂正)에 임명하는가 하면 조선 전기 서예계의 4대가로 손꼽힐 정도로 글씨에도 뛰어났다. 사후에 예산 덕잠서원(德岑書院)에 배향되었고 문집으로 『자암집(紫巖集)』이 전한다.
덕산군 출신으로 회암서원에 제향된 이담(李湛)[1510~1575], 조극선(趙克善)[1595~1658], 이흡(李洽)[1549~1608], 안민학(安敏學)[1542~1601] 등도 학식과 덕행이 높아 후세의 모범이 된 인물이다.
한편, 예산에 연고를 가지고 관련 유적과 기록을 남긴 인물로는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1539~1609]와 석루(石樓) 이경전(李慶全)[1567~1644] 부자를 들 수 있다. 이산해는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정치가·사상가·서예가로, 문집 『아계유고(鵝溪遺稿)』가 전한다. 이경전 또한 당대 문필로 이름이 높았으며 작품집으로 『석루유고(石樓遺稿)』를 남겼다. 이산해가 대술면 방산리에 묘소를 정하면서부터 자손들이 대술면에 세거하였다. 현재 『아계유고』, 『석루유고』 등 문집 목판본이 대술면 방산리의 아계 이산해의 사당에 소장되어 있다.
[조선 후기의 문인·학자]
17~18세기에는 예산군의 학문이 크게 일어나는데, 조선 후기의 강문팔학사와 실학자들이 예산에서 배출된다. 강문팔학사는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1641~1721] 문하의 여덟 제자를 일컫는 말로, 남한강 유역인 황강촌[현 충청북도 제천시 한수면] 한수재(寒水齋)에서 수학하였기에 강문(江門)이란 말이 붙게 되었다. 여덟 제자의 명단이 조금씩 다르지만, 대체로 한원진(韓元震)[1682~1751], 이간(李柬)[1677~1724], 윤봉구, 채지홍(蔡之洪)[1683~1741], 한홍조, 현상벽, 윤혼(尹焜)[1676~1725] 등을 칭한다. 이들 중 윤봉구·한홍조·현상벽 등 세 명이 예산 출신이다.
윤봉구는덕산 사람으로 호론파(湖論派)인 한원진과 함께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을 전개하며 호락논쟁에 참여한 중심인물로 꼽힌다. 또한 윤봉구가 덕산면 상가리 일대의 가야산 계곡에 주자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빗댄 지명을 붙여 현재의 가야구곡(伽倻九曲)이 되었다.
현상벽은 예산 사람으로 인물성동론을 주장하여 외암 이간과 함께 낙론파(洛論派)로 꼽힌다. 또한 율곡(栗谷) 이이(李珥)[1536~1584]의 이통기국설(理通氣局說)을 계승·발전시켰으며 예론에도 밝았다. 시문에도 뛰어나 10권 5책의 『관봉유고(冠峰遺稿)』를 남겼으며, 예산읍 관작리에 송시열(宋時烈)[1607~1689]·권상하 등을 배향하는 사우인 집성사(集成祠)의 건립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한홍조는 예산 사람으로 매우 총명하였음에도 관직에 나가지 않고 고향에서 학문을 갈고 닦으며 일생을 보냈다. 권상하의 시문집인 『한수재집(寒水齋集)』여러 곳에서 한홍조에 대한 칭찬을 발견할 수 있으며 권상하가 직접 시를 써 주기도 하였다. 한홍조의 여러 저술 중 『강상문답(江上問答)』이 유명한데, 권상하가 제자들과 당론에 대해 문답한 것을 기록한 것이다.
[예산의 실학자]
예산의 대표적인 실학자로는 여주이씨(驪州李氏) 가문을 중심으로 배출된 이용휴, 이가환, 이병휴, 이삼환(李森煥)[1729~1813], 이재위(李載威)[1745~1826] 등과 신암면 용궁리 출생의 추사 김정희가 있다. 이들을 통하여 조선 후기 예산에서 실학이 크게 발전하였다. 예산의 여주이씨 가문은 덕산현감 이명진(李明鎭)이 처향을 인연으로 예산군 고덕면 상장리에 입항하였고, 이후 후손들 중 성호 이익의 학맥을 이은 실학자가 여럿 배출되었다.
이처럼 18세기 성호학파의 여주이씨 일문 실학자들이 예산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면 19세기에는 김정희에 의해 일가를 이룬 실사구시학파가 대두되었다. 주로 이전 시대의 문화 전통을 비판적인 안목에서 정리하고 현실의 여러 부분에 걸쳐 진지한 탐구를 하여 역사학과 언어·지리·지지·금석학 및 농학·의학·천문학·동식물학 등 각 분야의 학문 발전에 도움을 주었다.
추사 김정희는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서 태어났는데, 경주김씨(慶州金氏) 일문이 예산과 관련을 맺게 되는 것은 김정희의 증조할아버지인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1720~1758]이 입향한 이후부터이다. 김정희는 박제가(朴齊家)[1750~1805]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는데 선행 실학자의 실증적 연구 방법을 계승하는 동시에 청나라의 고증학을 받아들여 실사구시적인 새로운 경학을 수립하였다. 한편 김정희는 서예에 있어서도 추사체(秋史體)라는 서체를 남길 만큼 조예가 깊었다. 추사 김정희의 고택과 묘소, 필적 암각문 등의 유적이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 남아 있다.
[의의와 평가]
예산군은 문인·학자·예술가가 다양하게, 그리고 각 시기별 특징을 보이면서 골고루 배출되고 활동한 곳으로 유명하다. 또한 관련 유적이 아주 다양한 형태로 남아 전하고 있어서 그 의의가 매우 크다고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