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600759
한자 李命俊
영어공식명칭 Lee Moungjun
이칭/별칭 창기(昌期),잠와(潛窩),진사재(進思齋)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고수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72년연표보기 - 이명준 출생
활동 시기/일시 1601년 - 이명준 생원시 합격
활동 시기/일시 1603년 - 이명준 정시 문과 장원
활동 시기/일시 1604년 - 이명준 서장관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09년연표보기 - 이명준 덕산현감 부임
활동 시기/일시 1613년 - 이명준 영덕에 유배
활동 시기/일시 1623년 - 이명준 장령으로 복직
활동 시기/일시 1624년 - 이명준 충청도관찰사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27년 - 이명준 전주부윤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28년 - 이명준 강릉부사 부임
활동 시기/일시 1630년 - 이명준 대사간, 병조참판 역임
몰년 시기/일시 1630년연표보기 - 이명준 사망
추모 시기/일시 1644년 - 이명준 좌찬성에 추증
거주|이주지 이명준 은거지 - 서울특별시 양천구
묘소|단소 이명준 묘소 -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신평리 지도보기
성격 문인
성별
본관 전의(全義)
대표 관직|경력 덕산현감|대사간|병조참판

[정의]

조선 후기 덕산현감을 지낸 문신.

[개설]

이명준(李命俊)[1572~1630]은 조선 후기 덕산현감으로 부임하여 선정을 펼쳤다. 계축옥사로 유배당했다가 인조반정과 함께 복직하여 병조참판에 올랐다. 1631년 지금의 예산군 덕산면 신평리에 묻혔다.

[가계]

이명준의 본관은 전의(全義)이며 자는 창기(昌期), 호는 잠와(潛窩) 또는 진사재(進思齋)이다. 아버지는 선조 때 청백리로 이름 높았던 병마절도사 청강(淸江) 이제신(李濟臣)이며 어머니는 목천상씨(木川尙氏)이다.

[활동 사항]

이명준은 이정암(李廷馣), 이항복(李恒福), 그리고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1601년(선조 34)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603년(선조 36) 정시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다. 1609년(광해군 1) 덕산현감으로 부임하였다. 재물을 탐하지 않고 검소하게 생활하면서도 백성을 다스리는 데 공명정대하였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1611년(광해 3)에 선정청덕비가 세워졌다. 이때 아버지 이제신의 시문을 모아 지역 인사들과 힘을 합쳐 『청강집(淸江集)』을 펴내기도 하였다.

1613년(광해 5) 계축옥사로 인해 경상북도 영덕으로 유배당하였다가 1623년 인조반정과 함께 장령으로 복직하였다. 1624년 충청도관찰사를 지내고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세자를 모시고 전주까지 피난하였다. 1628년(인조 6) 강릉부사로 부임해 선정을 펼치고 여러 가지 폐해를 엄단하여 강릉 주민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1630년 조정으로 돌아와 대사간에 올랐다가 병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인해 사직하고 양천으로 내려가 지냈다.

1630년(인조 8) 5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평생 검박하게 지냈기에 장례를 치를 비용조차 마련하지 못할 정도였기에 인조가 이를 애석하게 여겨 장사를 지낼 수 있도록 도왔다고 한다.

[학문과 저술]

이영준의 저서로는 『잠와유고潛窩遺稿』가 있다.

[상훈과 추모]

이영준은 1644년(인조 22)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아버지 이제신과 더불어 부자가 나란히 청백리로 녹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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