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6007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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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和順翁主 |
영어공식명칭 | Hwasunongju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왕족·호족 |
지역 |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고수연 |
출생 시기/일시 | 1720년 - 화순옹주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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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인 시기/일시 | 1732년 - 화순옹주 김한신과 혼인 |
활동 시기/일시 | 1725년 - 화순옹주 옹주 책봉 |
몰년 시기/일시 | 1758년 - 화순옹주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758년 - 화순옹주 묘소 건립 |
추모 시기/일시 | 1783년 - 화순옹주 정조의 명으로 열녀정문 건립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84년 05월 17일 - 월성위 김한신묘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89호로 지정 |
묘소|단소 | 월성위 김한신묘 -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
묘소|단소 | 화순옹주 홍문 -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
성격 | 왕족|옹주 |
성별 | 여 |
본관 | 전주(全州) |
[정의]
조선 후기 예산에 묘소와 열녀문이 세워진 옹주.
[개설]
화순옹주(和順翁主)[1720~1758]는 영조의 서녀로, 경주김씨 가문의 김한신(金漢藎)과 결혼하였으나 남편이 죽자 음식을 끊고 14일 만에 남편의 뒤를 따랐다. 조선시대 왕실에서 나온 유일한 열녀로,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 정절을 기리는 홍문과 능원이 조성되어 있다.
[가계]
화순옹주는 영조(英祖)의 서녀로 어머니는 정빈이씨(靖嬪李氏)이다. 1725년(영조 1)에 화순옹주로 봉해졌고, 1732년 영의정 김흥경(金興慶)의 아들인 월성위 김한신(金漢藎)과 결혼하였다.
[활동 사항]
화순옹주는 혼인한 지 16년이 지난 1758년(영조 34) 남편인 김한신이 38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곡기를 끊고 남편의 뒤를 따르려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영조는 “화순옹주는 월성위가 죽은 뒤로부터 7일 동안 곡기를 끊었다고 하니, 음식을 권하지 않고 좌시하면, 어찌 아비 된 도리라 하겠는가?”라며 화순옹주를 찾아가 미음 먹기를 권했다. 그러나 화순옹주는 영조의 명을 따라 한 모금 먹다가 토해 냈고, 이를 본 영조는 한 번 먹은 마음을 돌리지 않으려는 옹주의 뜻을 알고 탄식만 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화순옹주는 결국 음식을 끊은 지 14일 만에 사망하였다.
[묘소]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김정희 선생 고택[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43호] 옆에 있는 월성위 김한신묘[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89호 지정]에는 김한신과 화순옹주가 합장되어 있다. 묘소 뒤쪽에 곡장이 둘러 있고, 묘소 앞에 상석, 장명등, 망주석 1쌍과 문인석 1쌍이 서 있다. 묘비의 비문은 영조의 어필을 새긴 것이다.
[상훈과 추모]
영조는 화순옹주의 정절을 기리면서도 자신의 뜻을 저버린 데 대한 아쉬움 때문에 열녀정문을 내리지 않았으나, 1783년(정조 7)에 정조가 화순옹주가 살던 마을 어귀에 열녀정문을 세우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화순옹주 홍문은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 있으며, 1976년 1월 8일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45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