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6008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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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文秉錫 |
이칭/별칭 | 성암(成菴)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
시대 | 근대/일제강점기 |
집필자 | 최명진 |
출생 시기/일시 | 1892년 - 문병석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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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4월 3일 - 문병석 신례원 장날 예산군 독립 만세운동 주도 |
활동 시기/일시 | 1921년 - 문병석 천도교 예산교구 금융원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925년 - 문병석 예산 종리원 주임 종리사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926년 - 문병석 예산에서 6.10만세운동 주도 |
활동 시기/일시 | 1927년 - 문병석 신간회 예산지회 창립 |
활동 시기/일시 | 1931년 - 문병석 조선농민사 예산군지부 창립 |
활동 시기/일시 | 1936년 - 문병석 일본의 패망을 기원하는 멸왜 기도 운동 주도 |
몰년 시기/일시 | 1970년 - 문병석 사망 |
출생지 | 문병석 출생지 - 충청남도 태안군 원북면 방갈리 |
거주|이주지 | 문병석 이주지 -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탄중리 |
거주|이주지 | 문병석 이주지 - 충청남도 예산군 오가면 오촌리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강점기 충청남도 예산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개설]
문병석(文秉錫)[1892~1970]은 예산 지역의 3.1운동과 6.10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또한 신간회 예산지회를 창립하여 진보적 민족운동에 앞장섰다.
[가계]
문병석의 본관은 남평(南平)이며, 호는 성암(成菴)이다. 아버지는 동학 수접주 낙암(樂菴) 문장로(文章魯)이고, 형은 동학농민운동에 참가하여 관군에게 총살된 문구석(文龜錫)이다.
[활동 사항]
문병석은 1892년 태안군 원북면 방갈리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아버지 문장로가 동학농민운동의 주모자로 수배되면서 산간벽지로 은신 생활을 하게 되었고, 1900년경이 되어서야 예산군 신암면 탄중리에 정착하게 되었다. 오랜 은신생활로 정규 학교를 다닐 수 없었기 때문에 한문을 수학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자 문병석은 천도교 구파의 지역 책임자로 4월 3일 예산 신례원 장날에 군중 500여 명을 규합해 예산군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마기상과 함께 일본군에게 붙잡혀 예산경찰서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고 한쪽 귀를 잃는 상해를 입었다. 그 후 1921년부터는 천도교 예산교구 금융원 직책을 맡아 예산 지역 민족운동의 산파 역할을 담당하였고, 교구장을 여러 차례 역임하고 1925년에는 예산 종리원 주임 종리사를 역임하였다.
문병석은 1926년 순종황제 인산일에 예산에서 6.10만세운동을 주도하였으며, 같은 해 천도교 중앙종리원에서 천도교 구파의 청년 지도자들이 중심이 되어 천도교청년동맹을 결성하자 마기상·정규희 등과 함께 천도교청년동맹 예산지부를 결성하였다. 1927년 11월 14일 일제강점기 항일 사회운동 단체로 가장 규모가 컸던 신간회 예산지회를 창립하여 정치문화분과에서 예산 지역 진보적 민족운동의 중추적인 활동을 진행하였다. 또한 1931년 4월 26일 조선농민사 예산군 지부를 창립하기도 하였다. 문병석은 일본의 패망을 기원하는 멸왜 기도 운동을 펼치다 1938년 신천에서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고 풀려났는데, 1970년 사망할 때까지 후유증으로 고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