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6008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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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寅浩 |
이칭/별칭 | 도일(道一),춘암(春菴),박용호(朴龍浩)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충청남도 예산군 삽교읍 하포리 |
시대 |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정을경 |
출생 시기/일시 | 1855년 2월 1일 - 박인호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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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883년 - 박인호 동학 입도 |
활동 시기/일시 | 1908년 - 박인호 천도교 제4대 교주 취임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 박인호 3.1운동 주도 |
활동 시기/일시 | 1938년 - 박인호 멸왜 기도 운동 전개 |
몰년 시기/일시 | 1940년 04월 03일 - 박인호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박인호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 수훈 |
출생지 | 박인호 출생지 - 충청남도 예산군 삽교읍 하포리 114 |
성격 | 종교인|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천도교 제4대 교주 |
[정의]
일제강점기 충청남도 예산 출신의 천도교 제4대 교주이자 독립운동가.
[개설]
박인호(朴寅浩)[1855~1940]는 1883년 동학에 입도하여, 광화문 복합상소와 보은 장내리 교조신원 운동 참여로 교단 지도자로 부상하였다. 동학농민전쟁 당시에는덕산의 대접주로서 승전곡전투와 신례원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동학농민전쟁 이후에는 동학 재건에 노력을 기울였으며, 갑진개화혁신운동을 주도하는 등 동학교도의 민족의식 고취에 전력을 다하였다.
[가계]
박인호의 본관은 밀양(密陽)이며 자는 도일(道一), 도호는 춘암(春菴)이다. 초명(初名)은 박용호(朴龍浩)이다. 아버지는 박명구(朴命九)이고, 어머니는 방씨(方氏)이다.
[활동 사항]
박인호는 1855년 2월 1일 덕산군 장촌면 막동리[현 예산군 삽교읍 하포리]에서 태어났다. 박인호의 아버지는 소작농으로 집안이 매우 가난하였다. 박인호는 농사지을 땅이 없어 의술이나 집터, 묏자리 등을 봐 주는 풍수 등을 생업으로 삼기도 했으며, 머슴을 살기도 하였다.
박인호는 1905년 동학이 천도교로 개편된 후, 교단에서 교장, 고문, 금융관장, 경도사 등 여러 직책을 맡아 활발하게 활동한 것을 인정받아 1908년 제4대 교주가 되었다. 교주가 된 박인호는 교단의 조직과 규칙 개편을 진행하였다. 조직 개편은 1908년부터 1918년까지 10년 동안 교단의 중심 기구였던 중앙총부가 자리를 잡기 위한 노력이었으며, 규칙 개편은 천도교로 개편되면서 불안했던 조직을 안정화시키기 위한 노력이었다.
이러한 교단 정비를 통해 교단의 조직이 안정을 되찾자, 박인호는 교단을 중심으로 교육·문화 운동을 진행하였다. 천도교의 교리를 널리 가르치겠다는 의도로 1908년에 교리강습소를 전국적으로 설립하여 수천 명의 교역자를 양성하였다. 교리강습소는 천도교리뿐만 아니라 보통학교 수준의 교육을 실시하였다. 또한 교육 운동의 체계화를 위하여 사범강습소를 개설하였으며, 부인전교사와 부인순회교사를 지방마다 선정하여 여성 포덕과 교육에도 힘썼다. 아울러 1911년에는 기존의 강습소 등을 종학강습소로 확대하여 분포시켰다. 강습소를 통해 배출된 교인들은 천도교 발전의 근간이 되었으며 나아가 3·1운동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처음에는 천도교단 안에서의 교역자 양성에만 주력하였던 박인호는 이러한 교단의 교육 운동을 외부로 확대시켜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던 동덕여학교, 양덕여자학교 등 일곱 개의 학교를 인계하여 관리하였다. 동덕여학교·보성소학·보성중학·보성전문학교의 인계는 손병희(孫秉熙)의 지시로 인한 참여였지만, 양덕여자학교·삼호보성소학교·문창학교의 인수와 경영은 독자적으로 진행하였다. 박인호는 학교가 사회의 공기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개인의 독단적인 관리가 아니라 공공의 재단을 세우는 것으로 교육이 실시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몸소 실천한 교육자였다. 이 밖에도 박인호는 천도교단의 종교 계몽운동의 일환으로 교리서 발간과 교리강습소 운영, 기관지 발간 등을 활발하게 진행하였다.
교단이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자 박인호는 민족운동에 직접 참여하였다. 1919년 3·1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자금으로 세 차례에 걸쳐 총 6만 5000원을 지원하였고, 윤익선과 함께 독립선언 발표의 전말과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내용의 원고를 작성하기도 하였다. 비록 교주로서 교단을 책임져야 했기 때문에 천도교 대표 15인에는 제외되었지만, 3·1운동으로 교단의 재산이 일본에 의해 압수되자 이정화를 통하여 강계교구 모금 운동을 진행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활동으로 박인호는 1년 8개월간의 옥고를 치렀다.
박인호의 민족운동은 1922년 천도교가 신·구파로 분열되어 교주직을 사임한 후에도 계속되었다. 박인호는 조카 박래원이 주도적으로 참여한 6·10만세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으며, 1927년 아들인 박래홍을 비롯한 많은 교인들을 신간회에 참여시켜 활동하게 하였다.
1938년 박인호는 지병이 악화되어 활동이 자유롭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멸왜 기도 운동을 전개하였다. 멸왜 기도 운동은 교인들의 정신적인 결합을 도모하기 위한 식고문을 아침저녁 때마다 시행하는 계획과 국권 회복을 도모하는 구파의 활동 자금을 충당하기 위한 특별희사금 모집 계획, 그리고 일본을 소멸하여 독립을 기원하는 강한 의지를 담고 있는 멸왜기도문으로 특별 기도를 실시하는 세 가지 계획으로 진행되었다. 이 운동은 박인호의 지시에 의해 황해도에서 시작해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멸왜 기도 운동은 가장 종교적인 민족운동의 하나로서 매우 높은 정신사적 의의를 갖는다. 같은 시기에 천도교 신파가 친일 협력 활동을 전개한 것과 대조적으로 동학농민운동과 3·1운동의 맥락과 이어지는 큰 의의를 갖는 운동이었다. 박인호는 멸왜 기도 운동을 주도하다 1940년 4월 3일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박인호가 남겨 놓은 「춘암상사댁일지」를 이동초가 주해하여 2007년 책으로 출판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0년 대한민국 정부는 박인호의 공적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