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6008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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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文吾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충청남도 예산군 응봉면 후사리 |
시대 | 근대/일제강점기 |
집필자 | 김진호 |
출생 시기/일시 | 1883년 7월 10일 - 최문오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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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4월 5일 - 최문오 예산시장 독립만세운동 주도 |
몰년 시기/일시 | 1944년 03월 25일 - 최문오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최문오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 수훈 |
거주|이주지 | 최문오 거주지 - 충청남도 예산군 응봉면 후사리 |
활동지 | 최문오 활동지 -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면 예산시장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강점기 예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최문오(崔文吾)[1883~1944]는 1919년 4월 5일 예산군 예산면 예산시장에서 거행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활동 사항]
예산 지역 3.1운동은 3월 3일 오후 11시 30분경 윤칠영(尹七榮) 등 여러 명이 예산읍내 동쪽 산 위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것이 최초이다. 이후 몇 차례 독립만세를 외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일제의 사전 탐지로 실행에 옮겨지지 못했다. 3월 13일 대흥공립보통학교 학생 300명이 대흥시장에 나아가 독립만세를 외쳤다. 3월 31일에는 예산 읍내에서 약 60명이 헌병 분대와 군청으로 이동하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리고 4월 3일에는 읍내 주변에서 횃불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고 다음날인 4월 4일에도 오후 10시경부터 예산 읍내를 중심으로 군내 각 면의 18개소에서 횃불 독립만세운동이 있었다.
독립만세운동이 고조된 시점인 4월 5일 예산읍내 예산시장에서 대규모의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오후 3시경 신장면 죽천리의 박대영(朴大永)이 시장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면서 20여 명의 군중에게 독립만세를 부르도록 권유하였다. 군중들이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장 일대를 행진하자 참여 군중이 50여 명으로 늘어났고 점차 독립만세운동이 확산되면서 군중이 400여 명에 이르렀다. 만세 군중들은 예산시장에서 예산 헌병 분대로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이동하였다. 예산시장을 순찰하던 헌병들이 몇 차례 해산을 명령하였으나 만세 군중은 헌병의 해산 요구에 불응하면서 계속하여 “조선 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이에 헌병들이 주도 인물로 박대영을 지목하고 체포를 시도하자 최문오는 박대영을 체포하려는 헌병에게 달려들어 주먹으로 쓰러뜨렸다. 최문오가 헌병을 구타하여 박대영을 구출하면서 시장 군중 약 2,000여 명이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여 시장 일대를 활보하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후 최문오는 박대영과 함께 체포되어 5월 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경성복심법원을 거쳐 고등법원에 상고하였으나 기각되어 1년의 옥고를 치렀다. 1944년 3월 25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0년 대한민국 정부는 최문오의 공적을 기려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